QT

2019년 11월 27일 QT_윤 철 집사

작성자 관리자 날짜2019.11.27 조회수119
고린도 전서 QT / 4진 임 기환 지파 윤 철 집사

<< 말씀 : 고린도전서 9장 >>

1. 단락 나누기
1) 1절 ~ 15절 : 사도로서의 당연한 권리가 있으나 이를 내세우지 않는 것은 내 자랑이
헛된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함
2) 16절 ~ 19절 :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의 의무와 목적
3) 18절 ~ 23절 : 복음에 참여하고 영혼 구원을 위한 자기 부인
4) 24절 ~ 27절 : 최후 승리를 위해 달리고 내 몸을 쳐 복종시킴

2. 본문 이해
그 당시 고린도 교회는 신앙의 본질과는 무관한 다양한 신앙 외적인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바울은 담대함으로 9장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1절~15절을 보면 마치 바울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나열하며 지극히 교만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오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선포가 오늘날 소위 주의 일을 한다고 자부하며 스스로를 높이는 많은 사역자들에게 사역자로서의 지침이 되는 선포가 아닌가 합니다. 세상의 권리, 사도로서의 권리, 높아질 수 있는 권리, 섬김을 받을 권리…이러한 수많은 권리들을 위해 목청을 높이느라 어느새 무너져 가고 있는 많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있는 작금의 현실 앞에 바울의 이러한 당당한 외침은 오히려 요즘의 한국 교회가 찾는 참 사역자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하게됩니다.
바울은 다시 16절~19절에서는 지극히 낮은 종의 모습을 취합니다. 거기에 더해 18절~23절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영혼 구원과 복음 증거를 위해 철저히 낮아지고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갖는 참 증거자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과연 이러한 모습을 보며 그당시 많은 사람들은 무어라 평가하였을까요? 혹시 지조와 절개도 없이 여건과 환경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꿔간다며 비판하지는 않았을까요? 지금 저의 모습도 그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에 깊은 회개가 됩니다. 결국 이렇게 철저히 사도로서의 권리를 내려놓고 지극히 낮은자로 복음을 증거한 목적이 24절부터 27절에 나옵니다. 최후승리!! 우리 삶의 목적 역시 향방없는 달음질이나 허공을 치는 싸움이 아니라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기까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하여 썩지 아니하는 승리의 면류관을 갖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묵상 및 결단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 할 수록 바울의 핸디캡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며 교육을 받은 사도가 아니라는 점, 한때는 기독교 박해의 선봉에 서서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의 순교 자리에 증인으로 있을 정도의 악질적인 사람이었다는 점등…
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성격을 가만히 보면 참 까칠한 부분이 많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차 전도 여행에서 도망간 마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 그로인해 어찌보면 본인에게는 은인과도 같은 바나바와 결별하고 2차 전도 여행부터는 실라와 함께 하는 점, 베드로와 은근 경쟁심이 있어 보이는 성경 곳곳의 서신 기록…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묵상이지만 암튼 바울은 약간의 완벽주의자이며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제가 분석한 바울의 까칠한 성격입니다. 그렇게 자기 주장이 강한 것처럼 보였던 바울이 오늘 고린도전서 9장 20절~22절에 보면 마치 아무 주관도 없는 사람처럼 상황과 여건에 따라 그에 맞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행동에는 복음에 참여하여 몇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하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선명한 목적이 있음을 알게됩니다. 때때로 앞에서 말한 바울의 까칠한 성격을 보면 예전의 제 모습과 너무나도 비슷한 면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복음에 참여하기로 결단한 저의 모습 역시 바울처럼 모든 자아를 내려놓고 복음과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할텐데 왜 제 모습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게 아직도 강한 내 자아가 남아서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하기는 커녕 때때로 내가 섬기고 양육하는 가까운 지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조차 정죄와 판단의 마음이 드는것일까요?
나는 아직 자기부인이 덜 된 미숙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삶의 문제로 허덕이는 지체를 바라보며 그와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기도 좀 하라고 하는데도 말을 안들으면서 어떻게 주님이 당신을 돕기 바라나? 이기적인 사람아.’라고 정죄하고 있는 제 모습, 섬김과 헌신의 자리에서 잠시 지쳐 앉아있는 지체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상황과 환경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려고 하기보다는 ‘사역을 결정하였으면 최선을 다해서 헌신을 해야지. 만약에 회사 일이라면 저렇게 하겠어?’라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제 모습.
물론 겉으로는 그런 속마음을 철저히 가린 채 마치 주님 닮은 모습으로 미소 지으며 사람들을 대하기에 아무도 나의 그런 마음을 모르지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계속되는 탄식 소리를 너무나도 분명히 듣게됩니다.
그래서 저는 내년도 제 사역의 방향을 내 안의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다시 ‘첫 마음’을 회복하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지금의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실 것이기에 그렇게 되기 전에 소위 “말로 하실 때”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내년에는 고린도전서 9장의 바울의 모습처럼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저는 종이되고, 유대인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자가 되고, 율법 없는 자 같이 되고, 약한 자가 되어 주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 것을 결단합니다.
장자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장자처럼 살았더니 장자의 명분을 얻은 유다지파처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겼더니 나라를 얻은 다윗처럼 주신 복을 잘 경영하여 복에 복을 더하는 제가 될 것을 소망합니다.

4. 기도
사랑의 주님, 늘 주님 닮은 모습으로 살기를 소망한다고 입술로 기도하지만 나의 삶의 모습 가운데는 아직도 사랑하는 동역자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완악한 마음이 남아 있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 직면케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이제부터는 이전의 나의 죄된 모습은 거룩한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 주신 새 힘으로 유다처럼, 다윗처럼 살기를 결단하며 나아가오니 주여 새 힘 주시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와 더욱 가까이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