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박승호 목사 / 왕하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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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광수생각이라는 만화에 이런 글이 있었다. 시집간 딸이 생각난 아버지가 전화로 딸에게 보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딸아 사랑한다.” 아버지의 사랑고백을 듣고 딸이 한 말은 “아버지 술드셨어요?” 광수생각은 이렇다. “전화기 너머로 부모님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버지와 딸의 단절을 느끼게 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대화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가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Ⅰ. 마땅히 가르칠 것을 가르쳐야 한다.
{잠22:6]“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청소년의 범죄 유형 중에 마약중독, 가출청소년의 원인을 조사한 결과 부모의 문제, 가정의 문제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가장 심각한 교육문제는 가정교육과 신앙교육은 없고 학교에서 공부 잘해서 일등하라고 강요하는데 있다. 이러한 교육은 모든 사람을 경쟁자와 적으로 보게 하여 부모도, 친구도, 이웃도 잃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부모는 자녀의 앞날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한다. 자녀의 인격을 무시한 채 강요한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비뚤어진 자식이 회심하게 되는 동기도 부모의 사랑을 얻을 때이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참회의 글을 쓴 한 수감자의 글이다. “금수만도 못한 내 두 눈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눈물이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눈물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의 사랑을 다 경험해야만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 부모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연인과의 사랑이 그것이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 인간적인 사랑은 다 한계가 있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사랑이 다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랑도 변질된다. 가장 좋은 가정교육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교육이다. 부모가 하나님을 대행하는 사랑을 자녀에게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

Ⅱ. 포기하지 말라.
미국에서 12살도 채 안된 한 소년이 아버지에게 가벼운 야단을 맞은 후 총으로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있었다. 왜 아버지를 죽였냐고 묻는 경찰에게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요”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이는 홀로 감방에서 흐느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 미안해요. 그런데 정말 보고 싶어요.” 극단적인 양가감정으로써 애증관계이다. 애증이란 사랑하면서 밉고 미우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자녀는 그런 방황기를 지난다. 그러므로 그런 시기를 이해하고 참아야 한다. 기다려 주는 아비의 마음, 부모의 마음이 있을 때 방황기를 지나서 회복될 수 있다. 좋은 부모에게서 자란 사람은 효도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상처를 입은 자녀는 효도를 말하면 힘들어 한다. 그렇지만 좋은 부모를 못 만났다고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어도 행복하기만 한 가정이 아니었어도 세상에는 훌륭한 삶의 업적을 남긴 사람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전도여행을 많이 한 요한 웨슬리는 결혼생활이 불행했다고 한다. 아내의 난폭한 성격으로 인해 가정에 평화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는 가정의 문제로 자신의 사명을 등한히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의 그러한 가정 상황이 전도에 더욱 열심을 내게 했을 수도 있다.
아브라함 링컨도 아내의 성격 때문에 심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아내와의 다툼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보다 호텔에서 자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로 꼽힌다.
지금의 삶보다 더 영원한 것이 있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저주이다.
[잠21:19]“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잘 만나서 행복하면 좋지만, 그것 말고도 또 다른 가치가 있다. 마틴루터는 우리에게 네분의 부모가 있는데 하늘 아버지, 땅의 부모, 왕, 영적인 아버지 목사이라고 했다.
한 심리학자는 영원한 가치인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데 여러 단계가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부모를 통해서, 친구를 통해서, 스승, 이성, 배우자를 통해서 인생의 방향을 교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좋은 교우관계를 통해서 치유되고 좋은 목자를 만나서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도 된다. 그래도 안되면 상담가나 심리치료사의 도움을 얻기도 하며, 더 심각할 때는 하나님이 직접 치유하시기도 한다. 일생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요소요소에 과정을 두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자녀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Ⅲ.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12절“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가 드디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날이 다가왔다. 엘리사는 스승의 능력을 자신에게 갑절로 주기를 간청하며 따라다녔다. 그 때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내 아버지여 라고 부른다. 스승은 단순히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왕하13:14절에도 동일한 사건이 벌어진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왕은 정치적인 위기 앞에서 병상에 있는 엘리사에게 가서 내 아버지여 라고 부르짖는다. 요아스에게 있어서 엘리사는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였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 비밀을 잘 안다. 기름부음이 사람을 통해서 전수된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행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한 뜻은 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스승을 내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혹 내 부모가 부족해도 또 다른 부모가 있음을 말한다.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을 걸고 내 아버지여 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은 것은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성경과 탈무드이다. 탈무드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랍비들의 가르침이다. 그들에게 전승은 무엇보다 우선되는 가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른들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랍비들이 지나가기만 해도 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요한 것이 스승을 통해서 전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부모를 비하하는 말이나 스승과 지도자를 인정하지 않는 말이 너무 많다. 이것은 축복의 끈을 다 끊는 행위이다. 가정은 교육의 장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말로가 아니라 삶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곳이 가정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질서를 가르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갖다 주어도 아이는 망하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반드시 부모가 자녀를 축복한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바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에서도 부모의 비젼과 축복이 자녀에게 흘러가게 해야 한다. 가정은 최대의 축복의 장이다. 가정이 못하면 교회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축복이 전수되는 곳이다. 그리고 아비의 마음을 가진 리더에 의해서 운영되는 소그룹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축복이 흘러가게 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축복이 승계되는 장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