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나눔

弔問旅行記

작성자 설진용 날짜2004.08.17 조회수3460
어제 8월 16일은 우리 교회의 큰 일꾼인

강성욱 집사님과 임정희 집사님의 어머님이 소천하셔서

멀리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조문을 다녀오면서 차안에서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했는데,

몇자 적어 홈피에 올려보려고 합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屍體)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위 성경 구절은 어제 아침에 읽었던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아침에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올 봄에 죽은 처남 생각을 했습니다.

상가에 조문을 가는 터였고,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해야 했기에

처남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처남은 아내보다 2살이 많은 46살입니다.

정보통신부 공무원으로서

우체국장으로 근무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일 아침이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내가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심상치 않습니다.

곧 당황하는 빛이 보이고, 울먹이는 소리로 변해가며,

'아버지가 아니고 오빠야?'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곧 저의 장인은 90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입니다.

장남에게 사정이 있어서

차남이 모시고 살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늙으신 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차남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게 된 것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내는 정신이 혼비하여 망연자실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간단한 짐을 준비하여 전주에 내려가면서

내 머리 속에는 온통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永遠)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요한복음 11장 25-26절 말씀밖엔 없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면 시체를 향해 외치리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을 했습니다.




자꾸 가슴이 떨립니다.

할 수 있으리라는 벅찬 감격과 기대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더욱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永遠)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반복 반복하였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보면

대개 시체를 안치해놓은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껏 내 가까운 사람 중 죽은 사람이 없었기에

병원 영안실이나 장례식장에서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지 잘 모릅니다.



괴로워하는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밖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니 할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위 자식 개자식'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둘째 날 아들이 잘 걷지를 못합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울기만 합니다.

아내와 함께 두 다리를 주물렀습니다.

갑자기 왜 다리가 아프다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상가(喪家)에서의 영(靈)적인 싸움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고,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속으로 기도하면서 다리를 주무르다

전날 산에 올라갔었던 생각이 났습니다.

병원에 계속 있다보니 답답해서

아들을 데리고 병원 뒷산에 올라갔다 왔는데,

산에 다니지 않던 아들을 어른 걸음걸이로 걷게 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처남 가족은 천주교 신자입니다.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지만

향불 등 전통 의식이 겸해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좋았던 점은 성당 사람들이 번갈아 와서

연도(聯禱)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장례식장이 한산하게되면

유가족들은 쓸쓸해지고 더 슬퍼지게 마련이고,

조문객들은 무서워하거나 꺼림찍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조문을 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망자(亡者)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어야

천국에 잘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망인의 신앙 업적을 칭송하고

자손들과 조문객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연도서를 한 권 얻어오고 싶었는데,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가까운 성당에 가서 연도서를 한 권 사올까 합니다.



시체를 보아야 '일어나라'고 외칠 터인데

계속 그런 차례가 오지를 않습니다.

이틀째인 월요일 저녁에 염(殮)을 한다고 합니다.

성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고

가족들이 참석하여 의식을 진행하였습니다.



냉동고에서 시체를 꺼내옵니다.

'이때다.',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永遠)히 죽지 아니하리니"는 말씀을 붙잡고,

시체를 향해 '일어나라'고 외칠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제 입에서는 그 말이,

그 외침이 나오질 않습니다.

가슴만 마구 방망이질 쳐댑니다.



성경 말씀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성당 사람들이 모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를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시체가 나오기 전까지는

'당신들은 그 말씀을 암송만 하겠지만,

나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외치리라'하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냉동된 시체가 나오게 될 때는 용기가 없어서,

믿음이 약해서

시체를 향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처남은 일어나라'는

말을 외치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내 믿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깊이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풀무로 연단한 정금 같은 믿음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도 말입니다.



성당 사람들의 신앙을 잘 알지 못하지만,

믿음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말씀도 암송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를 살릴만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무덤에 하관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믿음이 부족한 것을

얼마나 주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는지...



처남은 성당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봉사도 잘 하였다고 합니다.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한 다비다는 살아났는데,

처남은 살아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을 가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신앙생활로 미루어 보아

주님을 영접하는 믿음을 가졌을 거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제 주일아침,

처남 때와 비슷한 시간에

강성욱 집사님의 모친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을 비롯하여 교회 여러 어른들을 따라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

교회에서 10시에 만나 출발하였는데,

다녀오는 동안 내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5인승 버스에 빈자리 없이 출발하였는데,

제가 앉은 자리는 맨 뒷줄 창가였습니다.

에어컨을 내내 켰지만

엔진에서 더운 열기가 올라오고,

또 에어컨 바람이 직접 오지 않는 곳이어서 좀 더웠습니다.



다들 옆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차안은 도란도란 얘기꽃이 피고 있었습니다.



강집사님 생각과

아침에 읽었던 성경 말씀, 처남 생각 등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느라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을 하면서 내려갔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잘 자기도 하고,

뒷자리에 앉으면 약간 멀미를 하기도 하는지라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좀 덥다 느끼면서 잠을 깨었는데,

하늘에 구름이 덮여있는 것입니다.

기둥은 보이지 않았지만

구름으로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35인승 버스 맨 뒷줄에 남자 5명이 앉으면

어깨가 서로 닿고 몹시 불편합니다.



더구나 성령님을 온몸으로 체험하기에

비교적 넓은 면적을 가지신

다른 교회 집사님이 한 분 계셔서 불편함은 더 컸습니다.



6시간 이상을 좁은 버스 속에서 시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주님께서는 구름으로 덮어주시고,

가끔씩 비도 내려주셔서

시원하게 다녀올 수가 있었습니다.







항상 여호와이레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공집사님 한 분이 왕복 12시간 이상을 빗길 운전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넉넉한 면적과 유머 그리고 마음씨를 가지신

다른 교회 집사님을 함께 보내주셔서

교대로 운전하여 다녀올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부산의료원에는 강성욱 집사님이 나와 계셨습니다.

항상 웃으시는 집사님의 모습 그대로

얼굴엔 미소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분명

'호로자식'이라고 욕했을 법도 한 일입니다.

하지만 집사님의 어머님께서

주님을 영접하는 믿음을 가졌고,

주님 곁으로 가셨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유가족이나 문상객이 미소로 대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6남1녀의 유가족 가운데

집사님과 동생과 누님만 신앙생활을 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형제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해야 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형제들의 신앙이

다른 경우 장례 절차를 두고 다투는 일이 잦습니다.

하지만 집사님께서 평소에 형제들에게 잘 하셨을 터이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기독교식 장례 절차를 택하기로 하셨다고 합니다.



형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너그럽게 대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저와 비교가 많이 됩니다.





저희 가족은 3남6녀입니다.

그 중 저와 막내 여동생만 신앙 생활을 해왔습니다.

여동생은 어려운 환경 속에 신학을 했고

신학을 한 매제와 결혼하여

지금 목회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년까지 출석했던 교회에서

2003년 제가 교회에 제출한 공동 기도제목은

제 부모님이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1년 동안 목사님과 많은 분들이 중보기도를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정확히 1년 기도를 다 채우고

2004년 첫 주부터

제 부모님께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시골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지금 부모님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대학원에서 노인교육을 공부하면서

노인들에게 자서전 쓰기를 지도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자서전 쓰기 대상을 제 부모님으로 해서 작성하였습니다.

A4용지 2/3 분량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제 좀 읽을만한 분량이 되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했는데,

칭찬하는 말로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재미있다고 합니다.



아직 교회 출석만 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신앙과 관련하여 쓸 내용이 별로 없지만

어머니께서 겪으셨던 삶은

신앙과 관련지어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자서전 1부는 완성되었고,

2부 신앙과 관련된 부분이 첨부되면

교회 홈피에도 올려놓을까 합니다.





강 집사님의 경우는

어머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셨지만,



장례식장 여기저기에서는 통곡하는 소리,

'똥먹어', '쌌다 쌌어' 외치는 소리,

술 취한 조문객의 비틀거리는 모습이

미로처럼 여기저기로 연결된

넓은 장례식장에 가득하였습니다.



자칫 '꿀'한 기분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쿨(cool)한 분위기를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동료 목사님과 연락을 하셔서

해운대 해수욕장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려가는 도중 비가 와서 시원했는데,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는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바다를 보는 순간 정말 쿨한 느낌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고

시야가 한껏 넓게 펼쳐지는 날씨였습니다.



해운대의 해운(海雲) 사이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이

Western Chosun Beach Hotel 너머로 비취고,

멀리 오륙도의 선명한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닷물에 곧 뛰어들고 싶었습니다.

갈아입을 옷이 마땅치 않았기에

우리 일행들은 바닷물에 발만 동동 담그며,

파도를 따라 내려갔다 피해 올라오기를 반복하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좁은 버스 안에서

웅크리고 6시간 이상을 달려야 했고,

또 장례식장에서 분위기가 가라앉았는데,

순식간에 기분이 전환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주님은 정말 멋있는 분이십니다.

꼭 필요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해수욕장에서 올라와서

우리는 부산 목사님께서 대접하시는

맛있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게낙찜이었습니다.

게가 낙지를 찜했는지

낙지가 게를 찜했는지 모르지만

맛있는 요리였습니다.




버스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시는 듯 하더니

식사비가 꽤 많이 나올 저녁 식사를 대뜸 대접받았습니다.



평상시 우리 목사님께서 어떻게 사랑을 베푸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 목사님을 어떻게 쓰시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는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이성찬 목사님께서 주도하셔서

노래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찬송가를 부르기도 머쓱하고,

니나노 가락을 뽑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다들 즐겁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유행가를 별로 안 부르기에

노래가 중간중간 끊어지기도 했지만,

웃으면서 재미있게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이성찬 목사님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재미있게 진행해주신 정동순 집사님,

생신을 맞아 출발할 때 꽃을 받으시고

기본이 한껏 Up 되셔서 여러 가지 유쾌한 말씀과

즐거운 노래를 선사해주신 최은오 장로님,



자리가 부족했기에 안내양이 앉는 불편한 자리에 앉아

여행을 이끌어주신 오동철 장로님의

훈훈한 미소와 마음씨가 있었기에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중 압권은 이성찬 목사님의 노래였습니다.

찬송가를 부르시는데,



얼마나 재미있던지

우리 모두 몇 개월간 분비될 엔돌핀이

한꺼번에 솟아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혜령 사모님 꽤 미인이신데,

사모님이 목사님의 그런 노래에 매력을 느끼셔서

결혼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올라오는 도중 목사님이 꽤 피곤해하셨습니다.

도착하여 곧 새벽기도를 인도하셔야 하기 때문에

차안에서 좀 주무셔야 했습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이리 저리 뒤척이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단거리 이동은 괜찮은데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는 차가 좀 좁습니다.

곧 주님께서 더 큰 차를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용인에 거의 도착해갈 쯤에는

폭우 수준으로 비가 내렸습니다.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교회에 세워두었는데,

교회에서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도착할 일이 심난했습니다.



도착할 때 비가 그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차게 비가 내렸는데,

교회 마당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뚝 그쳤습니다.

모두 비 한 방울도 맞지 않고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자전거를 타고 깨끗하게 씻긴 도로를 달려

함초롬히 젖은 나뭇잎의 흔들림을 느끼며

집으로 왔습니다.



아뿔사!

오는 도중에 비가 내립니다.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빗속을 자전거로 달리면서

나의 기도가 부족했음을 알았습니다.



교회에 도착했을 때 비가 그치게 해달라고만 기도했지

자전거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모두 차를 타고 귀가했기에

비를 맞지 않았지만,

자전거를 타야하는 저는

중간에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폭우가 쏟아질 때 차안에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교회에 도착할 때 비가 그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었으리라

짐작되는데,



다들 승용차로 옮겨타기까지만 생각하고,

자전거를 타고 귀가할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 사람들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하여

얼마 전에는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송태석 집사님의 어머님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었습니다.



좀 머쓱해서 그 분께 직접 말씀드리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그분의 얼굴을 뵈어서 알고 있었지만

송태석 집사가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여

장례식장에 가지를 않았던 것이

안타깝고, 또 집사님께 죄송스러운 생각이 자꾸 듭니다.



혹 송집사님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16시간 이상의 긴 여행이었지만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해주시고,

여러 가지 필요한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좋은 여행이 되도록 도와주신 목사님과

여러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설진용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