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11. 주일 QT(눅7:1-17) <겸손하고 담대한 믿음을 실천하자>
2진 1군 설진용 안수집사
본문 주요 내용 :
(:1-3) 백부장이 종을 치료해주시기를 유대인 장로들을 통해 예수님께 청했다.
(:4-5) 장로들이 백부장을 도와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6-8) 백부장이 집에 오심을 감당 못하니 말씀만으로 낫게 하시기를 구했다.
(:9-10) 예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이에 종이 나았다.
(:11-12)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어 사람들이 메고 나왔다.
(:13-15)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고 일어나라 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났다.
(:16-17)큰 선지자가 일어났다며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퍼졌다.
⇒ 백부장이 병든 종을 낫게 해달라며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다. 예수께서 찾아가시는데, 백부장이 예수님을 감당하기 벅차다며 말씀만으로 낫게 해주시기를 구하였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도 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종이 나았다. 나인성 과부의 독자의 관을 잡고 일어나라 하시자 살아났고, 소문이 유대에 널리 퍼졌다.
2. 묵상 :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백부장(百夫長)을 만난다. 로마의 백부장이면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쉽지 않은 위치에 있다. 그러나 그를 위해 유대인 장로들은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러 온다. 장로들은 백부장을 도와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다.
그는 점령국의 군대장이면서 피정복민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의 삶과 신앙을 존중하며 회당을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종이 병들어 죽을 지경이 되자 예수님께 고쳐주시기를 유대 장로들에게 부탁하여 청한다. 종 한 명이 병들었다고 점령지에 있는 한 선지자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러한 마음 자세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이를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과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백부장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며 믿는 믿음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크신 하나님의 선지자가 자기 집으로 온다는 것을 차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국인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왔던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가 직접 나오지 않고 종을 보내어 겨우 물에 가서 씻으라 한다며 그냥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집에 오심을 차마 감당할 수 없다며 말씀만으로 낫게 하시기를 구한다. 점령국의 군대장이면서 지극히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그 청을 들어 고쳐주려 가신다. 그 집에 가까워지는데 이번에는 벗들을 예수님께 보낸다. 그리고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오심을 차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집이 누추해서는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에 대하여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스라엘의 큰 선지자가 자기 집에 오는 것을 차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셨다. 그 겸손함을 인정하셨다. 놀랍게 여기셨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겠노라”고 하신다. 메시아가 왔건만 자기 백성 유대인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인인 백부장은 예수님께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 겸손함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 종을 낳게 해주신다.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앞에 백부장처럼 자신을 낮추고 다가가야 한다. 내가 높아지려 하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된다. 겸손하겠다는 다짐만으로 겸손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나를 쳐서 복종시키려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평상시 겸손하게 지내는 것 같지만 어느새 높아지려 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직분자일수록 겸손하기 쉽지 않다. 겸손하게 사는 것 같아도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자아가 불쑥불쑥 올라온다. 그러니 늘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살펴보며 자신을 쳐서 낮아져야 하리라.
나인성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독자가 죽어서 관을 메고 나오는 것을 보신다. 과부는 예수님을 전부터 알고 있었는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주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다. 고아와 과부처럼 낮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을 본다. 낮은 자라야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며 ‘일어나라’고 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아 말까지 한다.
주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주님은 믿는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주셨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선포해야 한다. 주님은 그럴 때 믿는 자에게도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신다. 겨자씨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신다.
2005년경에 셀원 한 명이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며 와서 기도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믿어야지 죽은 뒤에 기도를 해준다고 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울먹이며 말하는 그 셀원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다면 내가 가서 살아나도록 기도해주겠다고 하고 찾아갔다.
장례 절차가 다 끝나고 운구차에 실으려고 사람들이 관을 들고 나올 때였다. 사람들을 세워놓고 관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일어나라고 하며 관을 노크했다. 그가 살아나지 않았다. 살아났다면 아마 뉴스에 나왔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예수 이름으로’가 빠졌다. 평상시에는 기도를 다 하고 마치면서 ‘예수 이름으로’를 붙여 기도를 한다. 하지만 그런 비상시 기도에서는 먼저 ‘예수 이름’을 외치며 명령했어야 했다.
다른 이유도 있다. 열정은 있었다. 하지만 믿음이 부족했다. 큰일에는 큰 믿음이 있어야 했다. 감기에서 낫는 것이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구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큰 응답이 필요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는 깊이 있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기도가 없었다.
관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관을 붙잡고 일어나라고 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기이해보이고 황당하게 보였을 것이다. ‘별 정신없는 사람도 있네’ 하면서 비웃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기도하고 나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나도 뻘쭘했다. 운구차가 떠나고 사람들도 떠나는 것을 멋쩍게 바라보다 그냥 돌아왔다.
그 전과 후에 두 차례 시신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외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이후로 그런 기회가 있을 때, 담대하게 외치리라. 한 번 해서 안 되었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다. ‘예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약한지…, 교회 안에서는 태산도 무너뜨릴 것 같은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상황에 처하면 위축되고 오그라든다. 그런 온실용, 관상용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모여 있으면 믿음에 대하여 곧잘 말하나 교회 밖에 나가면 티를 내지 않고 사는 그런 신앙인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 나약한 믿음의 상태를 깨뜨리리라. 방안 퉁소 같은 믿음에 머물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기도한다.
3. 적용 및 실천 :
백부장의 모습을 통해 겸손함을 배우자. 주님을 겸손하게 따르자. 믿음의 형제들과 교회의 치리 앞에 나를 낮추며 따르자. 나를 통해 오직 주님만이 존귀하게 드러나도록 하자.
담대하자. 예수의 이름에 권세가 있다. 예수께서 행하실 것을 그대로 할 수 있고 또 더 큰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무한한 능력이 있으신 주님을 제한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고 그 이름으로 선포하자. 기도하고 선포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그저 이야기 속에서 교훈만 찾아내고 마는 것은 안 된다.
관념적 신앙에 머무르지 말자. 예수께서 하신 것은 예수 이름으로 모두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선포하며 이루어가자. 주님! 진실로 겸손하고 담대한 믿음을 갖도록 저를 붙들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