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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5-11 “육신이 말씀이 되어가는 성도”
1. 근본이 말씀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사는 것입니다(2절).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근본이 말씀이셨고, 말씀 그대로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삶을 총정리하면, 육신을 입으셨지만, 말씀을 이루고 사셨던 삶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어떠했겠습니까? 은혜가 충만하였고, 진리가 충만한 모습이셨습니다(요1:14). 그래서 그 어느 시대보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하였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각 사람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다양합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분들이 계시다면 더 잘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물음에 (답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묻고 답해야 할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늘 가까이에 있던 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르고 있는데, 어디서 떡을 사서 먹였으면 좋겠느냐라고 적당한 장소가 어디인지를 물어보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성도에게 있어서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우선은, 이런 질문을 통하여 상호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무엇이든 대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는 직접 개입하셔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도록 일깨워 주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대답한 것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대답한대로 행동하는 것은 여전히 육신이 말씀이 되어가는데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사실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이 없는 순간,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육신이 말씀이 되어가는 성도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응답하여 주신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는 순간부터는 말씀이 되어 가는 성도로 도약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주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여집니다.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는 먹을 수 있었던 실체입니다. 그러나 5000명이 먹기에는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그 음식이 실체이지만,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떡은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그 맛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붙든 것만으로 육신이 말씀이 되어가는 성도가 아닌 것처럼, 말씀 대로 살아보지 않고서는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음식을 먹어보지 않고서, 배부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맛을 알려면 내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육신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되어가는 성도로 조금씩 빚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육신이 말씀이 되어가는 성도로서 혼자 사는 것은 반쪽자리 삶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신이 말씀이 되어가는 성도로서의 핵심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눠준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떡과 생선으로 배를 채웠다고 만족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채워주신 것을 넘어, 영혼의 양식을 채워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관심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육신이 말씀이 되는 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사람들의 한 끼 식사를 위해 오시지 않고, 한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