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20:12, 엡 6:1-3, 마 15:4-9 ‘외면당한 계명’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효를 다하지 못한 자식들에게는 오늘의 어버이 주일은 몹시도 괴로운 주일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몹시도 부모님이 보고 싶은 주일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실 때 인간을 위한 부분의 가장 첫째 되는 계명으로서 효의 실천을 강력하게 명령하셨고 우리 주님도 실천적 차원에서 효의 절대성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효에 대한 계명이 외면당하지 않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시 하나님을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데 어떤 종교보다도 엄격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가 효를 강조한 것은 단순한 윤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효도에 대한 각별한 강조를 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을 핑계 삼아 부모를 섬겨야 할 ( )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마 15:4-9).
유대문화에서는 부모님이 원하시고 기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부모님께 드리고 싶지 않으면 ‘고르반-하나님에게 바칠 것’이란 말 한마디만 하면 부모님은 꼼짝없이 포기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불효자들은 자신들이 말한 대로 하나님에게도 바치지 않고 원하시는 부모님에게도 드리지 않은 큰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핑계 삼아 불효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이 문제를 심각히 꾸짖으셨습니다.
행여나 우리 성도들이 부모님을 찾아뵙고 사랑을 나누어야 할 자식 된 도리를 지켜야 할 때 교회의 일 때문이라는 구실을 가지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 경우가 있지 아니한지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부모를 청종하고 ( )해드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를 낳아 키우신 부모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라. 구시대 사람의 말이라고, 또는 교육수준이 낮은 탓에 나온 말이라고 경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하지 말고, 그 어버이에게 기쁨을 드리는데 깊은 관심을 기울이라는 말씀을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을 해 주시는 첫 계명으로서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효의 길은 부모에게 ( )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지금이 보답의 기회입니다. 감사와 보답의 시기는 나에게 기준을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곁을 떠나고 계시는 부모님에게 시간을 맞추어야 합니다. 좋은 음식, 좋은 의복 하나라도 손에 들고 어버이를 찾는 자식의 발길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발길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효에 있어서 오늘이 없는 내일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보답의 시기도 내일이 아니고 오늘입니다.
송강 정철님의 글이 떠오릅니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은덕을 어디다가 갚사오리/ 어버이 살아실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