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참된 쉼

심상법 목사 / 마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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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수년전 세간에 큰 인기를 끌었던 광고 카피이다. 피곤에 지쳐있는 현대인들의 갈망을 잘 표현해주는 문구이다. 이 땅 가운데 안식을 원하지 않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참된 쉼이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 돈도 외모도 어떤 제도도 참된 쉼을 주지 못한다. 참된 쉼을 가질 수 있다면 이것이 복음이다. 블루오션의 무한경쟁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아무리 수고해도 고생과 수고의 떡을 먹고 산다. 무거운 멍에를 지고 살아간다.
어느 누가? 우리 인생의 고달픔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가?

1. 예수님께 나아가야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쉼을 준다고 말씀한다. 예수님께 나아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다. 〔마 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돈, 권력을 찾는 인생은 그들이 기대하는 안식보다 실망과 상실, 절망과 외로움만 경험하게 된다. 어떤 수필가는 ‘인생은 나에게 술한잔 사주지 않았다’라는 글로 만만치 않은 인생을 노래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모습이 현대인의 우리의 모습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탕자는 아버지께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 절망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의 인생이 방향을 찾은 나침반인가? 아니면 아직도 남북을 찾지 못해 떨리는 나침반과 같은 인생인가? 어거스틴도 “주님안에서 안식을 누리기까지 내 마음은 평안을 얻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dona nobis pacem pacem!”(“도나 노비스 파쳄 파쳄!”-“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옵소서!”) 모든 인생들이 불러야 할 부르짖음이다. 주님 외에 어떤 것이, 어떤 사람이 평화를 줄 수 있겠는가?

2. 온유하신 주님이 참된 안식을 주신다.
〔마 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우리의 죄와 죽음의 멍에를 벗겨내고 위로와 평화를 주시러 오신 주님이시다. 섬김의 대속물이 되어 주시러 오신 분이시다.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다. 온유라는 뜻은 약함을 말하지 않는다. ‘통제된 힘’을 뜻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모세의 위대한 힘은 온유에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단 한번 통제되지 못한 폭력으로 인해 안식과 번영이 있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온유함을 잃어버리면 안식이 오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대한 교훈을 준다. 예수님은 온유함으로 우리를 안식의 땅으로 인도할 위대한 구원자이시다. 우리의 구원, 쉼, 참된 행복, 영원한 쉼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신 힘을 다 사용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 십자가에서 말없이, 힘없이 끌려가는 어린양이 되셨다. 고난 받는 종으로 어린양 되심으로 우리의 모든 짐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3.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멜 때 참된 안식을 누린다.
〔마 11:29-30〕“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더 깊은 안식을 누리는 비결은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패러독스(모순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옳은 것)가 있다. 멍에를 벗는 것이 쉼이 아니라 멍에를 메는 것이 쉼이라는 것이다. 세상종교가 말하는 쉼은 버리고 떠나라고 말한다. 속세의 멍에를 벗는 것이 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멍에를 지라고 말한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멍에는 두 마리 짐승을 결속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은 주님과 동행함을 의미한다. 주님과 동행하며 제자의 삶을 살 때 안식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어미소와 함께 멍에를 멘 새끼소는 따라만 가면된다. 무거운 멍에는 엄마소 목에 걸려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은 주님이 무거운 멍에를 대신 져주시는 것이다. 〔출 33:14〕“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 광야를 살아도 그것이 풍요로운 안식의 땅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여호와 닛시, 여호와 라파로 만났다. 그들은 광야에서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했다. 우리의 인생이 광야라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면 안식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