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세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최소한의 권리를 행사하는데도 세례를 기준으로 한다. 세례를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세례는 방향전환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이제는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하는 고백으로 바뀌는 삶, 이것이 제 2의 회심이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환점이다.
Ⅰ. 세례의 의미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하신다. 동일시를 신학적으로 Identification 이라고 하는데 둘을 똑같이 봐준다는 것이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는 전환점이다.
[롬6: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내가 십자가를 지지 않았고, 내가 부활하지 않았고, 내가 승천하지 못했지만, 세례 받을 때 내가 계약하면 그 때부터 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나의 것이 된다. 이렇게 세례는 옛사람은 죽어 장사지냈고 새롭게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세례를 그리스도와의 결혼으로 표현한다. 그 결혼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가 한 몸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을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이 부부관계를 설명하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말하였노라. 이 비밀이 크도다.’고 했다.
결혼은 내가 당신 인생을 책임지고 당신이 내 인생 책임지는 것이다. 둘이지만, 하나인 것이 결혼관계이며 철저하게 상대에 맞추는 것이 결혼이다. 바로 이런 결혼을 하나님은 우리와 하려고 하신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먼저 고난으로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는 일, 하나되는 일을 하게 하신다.
∥ 광야를 주신 이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대행자로 부르셨다. 하나님처럼 사람 살리는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적당하게 제한시키는 훈련의 장소가 바로 광야이다. 마치 대학입시를 위해서 모든 것을 절제하는 것처럼 신앙훈련도 마찬가지이다.
광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고 하는데 이 ‘미드바르’라는 말은 ‘말하다’는 뜻이다.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내 말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대화는 상대의 말을 듣는 일이 더 중요하다.
촬스 스윈돌이 광야를 설명하면서 모세가 4가지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했다. ①무명박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40년의 숨겨진 삶을 살았다. 사람들이 칭찬하지 않아도, 이름을 얻지 못해도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②시간 박사- 하염없는 세월, 40년을 살다보니까 이제 기다리는 것이 아주 몸에 익어 있다. 인스턴트에 우리는 얼마나 익숙해 있는가? 시간박사가 돼야 된다. [갈6:9]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시간이 약입니다.’ 라고 말할 때가 온다. 세월이 익어야 열매로 나타나는 게 있다.③고독박사- 침묵의 고요, 고독의 고요, 분주함이 아닌 묵상의 능력을 모세가 배웠다. 자연, 돌, 구름, 달, 꽃을 보면서 하염없는 세월 동안 조용히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고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훈련을 광야에서 배웠다는 것이다. ④불편박사- 거친 환경, 모든 게 열악한 조건 속에서 40년을 살았기 때문에 나중에 백성들과 같이 40년 불편한 생을 살아도 능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저절로 지도자가 되는 법이 없다. 훈련 받아서 자격증을 획득해야 된다.
Ⅲ. 세례의 적용
그러면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세례를 적용하는 게 뭔가? 세례는 받는 순간부터 가치관이 달라진다. 선악이 아니고, 옳고 그름이 아니라, 순종할 것이냐, 거절할 것이냐다. 예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이 할례 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아들을 바치라고 한다.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또 제자들에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라.’ 이건 이해가 안 되는,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얘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순종하는 것, 그것이 순종이다.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와 자녀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목자와 양의 관계는 선악의 개념이 아니다. 건강한 관계는 신뢰함으로 하는 복종의 관계이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받아들여서 복종할 것이냐, 거절할 것이냐? 로 결정한다.
세례 받은 이후에, 하나님은 억장 무너지는 요구를 계속 하신다. 광야로 데리고 나가고, 원수를 만나게 하고, 물 없는 곳으로 끌고 가고, 그러면서 정말 이 사람들의 마음이 세례 받은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세례받은 나는 내 건강, 내 언어, 내 표정관리, 내 대인관계, 내가 하고 싶은대로가 아니라 억지로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쪽으로 해야 된다. 그렇게 하면서 훈련 받다 보면 그것이 나의 인격이 되고 삶이 된다. 이것이 광야이다. 세례 받았는가? 이제 하나님과 같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로 가고, 하나님의 언어로 우리가 말하고, 하나님으로 사는 것, 하나님으로 행동하는 것, 세례 받은 사람의 삶이다. 이렇게 체결한 계약대로 가면 우리의 광야를 단축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