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거룩한 임재로의 부르심」

박승호목사 / 레11:44-45

dot01.png

본문

우리 신앙생활에서 절대로 간과해서 안될 것이 거룩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고 결단했지만, 우리 안에 형성된 자아가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이 안될 때가 있다. 양육패턴에 의해, 결정된 나, 그 외에도 다른 사람, 환경에서 받은 영향력들이 우리 속에 흘러들어와 있다. 나무의 전문가는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그 나무의 성장과정을 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도 내적치유를 공부해 보면 지금의 모습은 과거의 경험이 오늘의 모습을 결정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출발했지만, 그러한 과거의 영향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습으로 의 변화는 오래 걸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참아주시는 큰 사랑을 베푸셨다. 하나님의 그 의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성품을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이 나타나기까지 기다려 주심이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사랑과 공의이다. 방향이 없는 사랑은, 원칙이 없는 사랑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동시에 사랑이 없는 공의는 사람을 메마르게 한다.
예를 들어 한 스승이 있어서 한 제자를 지목하여 기술을 전수하려고 했다면 기술을 전수하기까지 많은 어려운 과정을 그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승에게 지목을 받은 그 제자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 땅의 통치자께서 나를 부르셔서 내가 너를 불렀다. 내가 너를 책임진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엄청난 특권이요 영광이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평생 응답하면서 산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의 삶일 것이다.
오래 신앙생활하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이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통치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대행자로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기 까지 오래 기다리신다. 축복을 주어도 그것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알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이 이 땅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사탄은 이렇게 하나님의 대행자로 서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게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상처를 받게 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목적을 자꾸 무산시킨다.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가 쓴 책,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에서 작가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했다.
작가가 일본에서 친구와 싸우고 돌아오면 그의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 그 집에 찾아가서 사과하게 만들고 그의 어머니는 그 상대편 부모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은 아이가 싸우고 들어왔을 때 찾아가는 것은 같다. 그러나 자기 아이의 잘못과 상관없이 자기 아이편을 들면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묻는다.
횡단보도가 아닌 곳으로 뛰어들어 사고가 날 뻔 했다. 놀란 운전자가 아이들에게 호통을 쳤고, 아이들이 사과를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한 어머니가 이 장면을 보고 나타나서 운전자에게 마구잡이로 욕설을 했다. 한국에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막 소리를 질렀더니 그냥 가더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공의를 어떻게 이루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르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면 행동에 있어서 판단기준을 잃어버리게 될 확률이 높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는 책임지는 사람보다 책임을 회피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원칙이 없는 사랑일 때는 사람을 타락하게 만든다. 자기가 잘못을 해놓고도 잘못을 모른다. 이런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 똑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같이 잘되는 방법을 가르쳐도 남이 죽어야 내가 산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삶의 방향을 전환하지 못한다.
이런 우리들을 왜 그토록 주님이 참아주셨는가?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레위기는 종자를 확인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하씨 집사람이 마씨를 닮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책은 부담스런 책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흠모한다고 한다면 레위기만큼 우리에게 하나님을 설명하는 책은 없다.
하나님께서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결단을 해야 하는지를 보게 한다. 내가 선택하고 결단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지만, 끝까지 순종하지 않고 거부하면 버림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레위기의 주제이다.

Ⅰ. 말씀을 들으라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 있다. 즉 제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한다. 또한 사람을 섬기는 법이 있다. 사람과의 관계는 언어관계이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말을 해도 듣지 않으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말씀으로 오셨다. 사람의 언어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수단이다. 어떤 언어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결과들이 달라진다.
듣는 것이 관계의 출발이다. 그래서 상담학에서는 상담의 중요한 첫 번째가 경청이다. 듣지 못하면 상담자의 자격이 없다. 부부관계에서 배우자 존중의 첫 번째 단계가 말의 존중이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는데 그 제사의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레위기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식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방법으로 드려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에 대하여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붙잡아야 한다.
선물을 한다고 할 때, 좋은 선물이란 주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배려된 선물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할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다행히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성경에 다 기록하고 있다.
[레11: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레1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롬12:1-3]“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예배란 하나님의 뜻,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드리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뜻을 묻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종교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금송아지는 내가 만든 하나님이다.
레위기를 총27장으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 20장을 시작할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가라사대”로 시작한다. 이 말을 꼭 이스라엘에게 고하라고 하신다. 회막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라고 하신다.
1장, 4장, 6장, 8장, 11장에서 25장까지 그리고 27장까지 똑같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그 사람의 필요를 알면 쉽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바로 예배드릴 수가 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예배에 있어서 천주교는 의식에 초점을 두지만, 개신교는 말씀하심에 포인트를 둔다. 그래서 개신교 예배에서 가장 많이 할애되는 시간이 설교이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매주일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듣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백성들에게 직접하시지 않으시고, 회막에서 모세에게 하셨다. 말씀을 들은 모세는 그 말씀을 또 백성에게 전달하는 이런 구도를 두셨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방법이다. 오늘날에도 목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그 음성을 선포해야한다. 그러므로 들음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목양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랜 연단을 그쳐서 지도자를 세우신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자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것이다. 지금도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행한 시대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대행자로 의식하지 않는다. 사탄의 방해가 거기에 있다. 사탄은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를 불신하게 만들어서 말씀을 들리지 않게 한다. 말씀을 듣는 자세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겠다고 하는 사람이 제대로 듣는 사람이다. 말씀을 즐기는 사람, 평가하는 사람. 심지어 꼬투리를 잡으려고 듣는 사람이 있다. 시대가 불행한 시대이기 때문에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복종하려고 듣는 사람이 예배의 자세를 바르게 갖는 사람이다. 학교교육에 문제가 많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맡긴다. 그래도 학교 교육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신뢰하지 않으면 교육을 시킬 수가 없다. 교회가 바로 그런 관계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목사에 대한 신뢰, 교구장에 대한 신뢰. 신뢰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의 인격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심을 믿어야 한다.
가령, 우리가 미국대사를 믿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하는 권위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 회복되어야 할 영적 질서는 말씀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하는 관계이다. 모든 관계를 하나님나라의 질서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구약시대에도 예배를 미신적으로 사용했던 사람이 있다. 사울왕 때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와중에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미신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 없는 종교생활의 결과이다. 예배가 미신적으로 사용되어 지는 경우가 많다. 인격적 갈망이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 이다. 그런 잘못된 예배를 보면 다음과 같다.
1)가인의 예배- 말씀하신 대로 하지 않은 제사이다.
2)사울의 예배 -삼상13:8-13
3)웃사의 섬김- 법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잡았는데 왜 벌을 받는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면 이해가 안되도 믿으라. 신앙은 판단이 아니라 신뢰이다.
4)나답과 아비후의 죽음-다른 불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5)다윗의 성전건축-그토록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데 왜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는가? 너는 피를 흘려서 안된다. 다윗의 훌륭한 점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안된다고 했을 때 다윗은 그것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리고 그 아들 솔로몬 때 성전을 건축하도록 모든 준비를 갖춘다. 이렇게 다윗은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듣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왜 이렇게 힘든 일을 경험하게 하셨을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서 변화를 받아..라고 하셨다. 기록된 말씀, 지금 감동주시는 말씀,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꾸 들으려고 해야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 듣는 것이 중요하다. 주일 메시지를 통해서 강단의 선포된 메시지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야 건강한 신앙이다.

Ⅱ. 성막으로 가라
성막의 구조를 따라가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출25;8-9]“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구상된 하늘의 양식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이 성소의 설계도를 직접 만들어 주셨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드러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인간의 도덕에 의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성막은 예수님의 예표이다.
[히9:1-2]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성막의 구조이다. 문-번제단-물두멍-떡상-등대-분향단-언약궤가 있다.
*문-문은 들어가는 곳이다. 누구든지 문 안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에 들어간 것만 관심한다. 그러나 그 문에 들어가는 사람은 철저하게 원칙에 의해서 살아야 한다.
문에 대해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10:9] “내 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니라”
*번제단-피가 있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물두멍-물에 의한 씻음이 필요하다.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이다. 이것이 자기부인을 한 사람이 드리는 예배이다. 여기는 제자장들만 들어간다. 제사장 마인드가 될 때 남을 섬길 수 있다는 말이다.
성소는 두곳으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성소이고, 두 번째가 지성소이다.
*떡상-떡상에는 12개의 떡을 진설한다. 제사장들은 또 다른 양식이 있다. 일반 백성이 먹는 만나가 아닌 하나님의 떡이 있다. -하나님의 음식으로 채워져 있느냐?
*금등대- 기름부음, 성령의 빛, 성령의 조망을 말한다. 낮에는 자연의 빛이 있다. 그러나 밤에는 등대의 빛이 있다. 그러므로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은 자연빛의 사람이다. 등대의 사람, 영광의 사람. 성막까지 들어간 사람은 밤에도 빛이 있다. 환경에 의해 사는 사람은 자연빛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등대의 비침이 있는 사람은 환경적으로 어두어도 성령의 조망이 있기에 환경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지성소- 대제사장만 들어간다. 대제사장에게는 더 큰 빛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늘 빛가운데 산다.
*분향단-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찬양, 하나님께만 올라가는 향기이다. 나를 위한 기도는 번제단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하나님만을 위한 기도이다. 기도의 향이 준비되어야 한다.
제사장은 에봇을 입는다. 그 옷에 종을 단다. 허리에 끈을 묵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데 들어가면 즉석에서 죽는다. 종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그런데 죽은 대제사장을 건지기 위해서 들어가면 그 사람이 죽는다. 그래서 종을 달았다. 혹시 죽었을 때 끈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이다. 성소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그렇게 엄격한 기준이 있다.
*언약궤-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나의 약속, 비전, 꿈인가? 지성소의 삶은 나의 최대의 갈망이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삶을 말한다.
[히8:1]“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8:2]“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나타낸다.
[히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좆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양식, 하나님으로 오는 빛, 경배의 삶이 있는 삶이 제사장이다. 더 깊은 곳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의 빛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왜 40년이 걸렸을까? 사람 하나 만드는데 수 십년이 걸린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고, 하나님의 얼굴이 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세월을 두고 점점 변해가는 것이다. 성막이 이스라엘 진영 중앙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에 오셔서 우리를 이끌기를 원하신다.

목적: 레위기 20;24 거룩해야 축복이 있다.
[레20:24]"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레20:25]“너희는 짐승의 정하고 부정함과 새의 정하고 부정함을 구별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부정한 것으로 구별한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는 곤충으로 인하여 너희 몸을 더럽히지 말라”
[레20:26]“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거룩해야 그 땅을 주겠다고 하신다. 왜 두 사람만 가나안에 들어갔는가? 그 수준에 이른 사람이 두 사람밖에 없었다.
Ⅲ.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라.
결국 우리가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되어 있다. 성품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예배에 합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형식만 있고 삶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런 삶이 없는 제사는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사1:10]“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스라엘을 기리켜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한다. 얼마나 타락했으면 이런 표현을 쓰셨겠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의 형식이 아니라 인격의 변화이다.
[사1: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레1: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레1: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암5:21-24]“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은 우리를 40년간을 기다리신다. 목적은 공의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미6:6-8]“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것은 교회안에서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조용하고 사회에 가서 큰소리를 쳐야 한다. 정말 큰소리쳐야 할 것은 현장이다. 세상이 변해서 불의가 만영할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야 한다. 모든 학생이 컨닝을 해도 컨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학생으로 정의를 외쳐야 한다. 모든 사람이 신호위반을 해도 신호등을 지키는 기독교인, 이렇게 세상의 빛으로 사는 데 큰소리를 쳐야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고한 자존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말로만으로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어야 영향력이 있다. 당신 때문에 내 인생에 빛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천명이 나와야 한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어야 한다. 사탄의 전략은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게 한다. 예수님께도 그들은 시비를 걸었다.
[마22:15-21]“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예수님의 답은 하나님 중심의 원리를 말씀하셨다. 쓸 데 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 용인을 변화시키는 것은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나의 삶이 변화되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왜 레위기를 배워야 하는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용인을 변화시키는 일,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주는 일은 우리의 변화에 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모습으로 살게 할 것인가가 목사의 고민이다. 목사는 이 일에 생애를 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갈망을 봐야 한다. 나를 통해서 구속사를 이룬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이룰 것인가를 보자. 가나안의 통치권, 권세와 부요함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지를 봐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지적에 의하면 실제로 영국의 역사에서 크게 부흥이 일어났는데 그 부흥이 일어났던 이유, 사회가 변화됐던 이유는 사회적 캠패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한 웨슬리의 복음 운동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국에서 200년간 행해지던 노예무역이 폐지된 것은 윌리암 윌리포스트라는 국회의원이 회심한 결과였다고 한다. 그는 영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앞장서서 결국 그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도록 하는데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요한웨슬레 목사님은 죽기 전에 사력을 다해 이 윌리암 윌리포스트 국회위원에게 노예폐지 운동을 독려하는 편지를 썻다고 한다. 윌리암 윌리포스트는 그 후 40년 동안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목사는 이런 일에 생명을 건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대행자가 될 수 있을까? 생명을 주는 사람으로 변화시킬까를 생각한다.
한 사람이 천을 책임질 수 있는 지도자를 만드는 교회, 거룩이 인격이 되고 삶이 되고 습관이 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내 얼굴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나가도록 하는 하는 것이다.
강국을 이루리라. 누굴 통해서? 바로 나를 통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