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인물이 없다!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시대이다. 어디를 가나 사람을 구하려는 열의가 대단하다. 많은 기업들이 인재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학력, 인종, 성별을 가리지 않겠다고까지 한다. 그 한 사람이 쓰러져가는 회사를 다시 세우기도하고, 한 나라를 세우기도 한다. 한 기업이나 나라의 진정한 자산은 바로 사람이다. 그들에게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사람의 영향력이 대단한 시대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자산 역시 사람이다. 교회라는 말 자체가 사람들을 의미한다. 교회는 사람들을 길러 내야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자.
Ⅰ.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들어 이 세상을 간접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의 하나님의 원칙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신이 이름을 짓지 않고 사람인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셨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대행자로 아담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나라를 세우지 않으시고 사람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보라.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죄악이 심히 크기 때문이다.(창18:20).죄의 결과는 사망이다(약1:15).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죄악으로 멸망 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도 구원하기 원하셨다. 그런데 그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했다. 의인 열 사람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그 성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그 `열사람`을 찾으셨다.
사사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떠났고, 그러면 그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심판의 도구는 주로 `주변 정세` 였다. 즉, 주변의 나라들을 통해서 고생 고생하다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사사`를 일으켜서 구원해 주셨다. 이러한 역사의 반복을 기록한 책이 바로 사사기이다. 하나님은 사사들, 곧 그 시대의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 통해 일하신다.
또 하나님은 왕을 세워서 쓰셨다. 이스라엘 전성기인 다윗 시대를 지난 후,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하면서 제사를 드렸다. 이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사람을 통해 일하심을 알 수 있다.
(대하 7:13~14).“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은 한 나라의 죄악으로 인한 자연적인 재앙을 고치실 때 "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셔서 나라를 회복시키신다.
Ⅱ.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1. 충성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시101:6)“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여기서 말하는 `내`가 누구인가?
시편 101편 숫자 옆에 `다윗의 시`라고 적혀 있으니까, 1차적으로는 다윗을 뜻할 것이다. 다윗은 충성된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러므로 다윗 왕국을 이루게 된 것은 다윗이 충성된 사람들을 찾아서 자신 옆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편 101편에서 말하는 `내`가 다윗 한사람만을 뜻하는 것이겠는가? 다윗 한사람만 뜻한다면 굳이 그것이 시편 101편에 있을 이유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말하는 `내 눈`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을 뜻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뜻한다. 이것이 시편 101편 6절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눈은 이 땅을 두루 살피시면서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렇다면 왜 충성된 사람을 찾으실까? 하나님의 일에 쓰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눈은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이 땅을 두루 살피면서,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신다.
2. 원어에서의 `충성`- 믿음과 관련된다.
충성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라고 나온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충성의 근본이 “자신”이다. 자기 자신이 마음으로 우러나와서 하면 그것이 바로 충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헬라어로 `충성` 이라는 단어는‘ 피스티스’이다. 그리고 그 어원은 ‘페이쏘’ 이다. 신약 원어성경에서 ‘페이쏘’라는 단어가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모두 찾아보면 `믿다`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쓰였다. 이렇게 성경적인 `충성`은 `믿음`과 관계가 아주 깊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성경 로마서 롬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그 듣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충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믿는 데서 나오는 행동"을 충성이라고 정의해야 하고, `믿음`과 `충성`이 똑같이 헬라어 `피스티스`에서 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같음을 말한다. 그래서 믿음 없는 충성이 있을 수 없고, 충성 없는 믿음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충성과 믿음은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는 것에 뿌리를 둔다.
그리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충성(忠誠)`이란 한자로 써 봐야 정확한 성경의 의미가 살아난다. 충성(忠誠)은 `마음(心)의 중심(中)에서 하나님의 음성(言)을 듣고 그것을 이루는 (成) 것이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충성을 연구하면 할수록 이 한자는 성경적인 의미를 잘 정리해 놓았다.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충성’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충성인지 아닌지 알려면 스스로 이렇게 물어보면 된다. "나의 동기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를 물어 보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다가 상처 받은 분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대부분“내가 얼마나 열심히 충성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충성의 댓가가 이런 겁니까?`라면서 버럭 화를 내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고 책임도 여러 사람에게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진작 자기의 충성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해 보았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충성은 그 출발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결과가 내 기대와는 다르고 혹시라도 그 결과로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그 출발은 하나님이다. 남들이 알아 주든 알아 주지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충성은 어려움이 오면 사람에게 원망과 탓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고 지금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므로 하나님께 묻고 그분만 계속 의지하면 된다.
이제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의 모델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3. 충성의 모델
1) 충성의 모델 : 모세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히3:1-2)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충성의 모델`은 `예수님`과 `모세`이다. 물론 아브라함, 요셉, 다윗, 사도 바울도 충성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에서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대표로 말씀하셨을까? 절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어떤 사람을 모델로 말씀 할 때는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백성들이 모세를 대항해서 원망할 때마다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부르짖는 모습을 볼 수 있다.(출15:25). "하나님, 물이 써서 못 마시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죠?" "백성들이 고기 먹고 싶어서 난리입니다. 어떻게 하죠?" "뱀에 물렸대요. 어떻게 할까요? 등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아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항상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다"(출15:25).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민11:18),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라!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21:8).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하나님이 지금 나타나셔서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나는 과연 순종할 수 있을까? 뱀에 물리면 십자가로 찢어서 독을 빼내는 게 정상인데, 장대에 달린 뱀을 보라는 것은 정말 쉽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장대에다 뱀을 달아매라고 하면 모세는 그대로 했고, 그것을 쳐다 본 사람이 즉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다.(민21:9)
바로 이러한 모습이 모세의 삶의 특징이다. 자기를 대하여 끊임없이 원망하는 백성을 성질대로 안 대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 가서묻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며 살았다. 그런 모습을 `충성`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좋기 때문에, 히브리서 3장에 `하나님의 온 집에 모세가 충성했다`고 충성의 모델로 모세를 제시한 것이다.
2) 충성의 모델 예수님 (요14:10) (요12:50) (요14:24)
히브리서 3장에서 모델로 제시한 또 한 분, 예수님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제일 많이 하신 것이 무엇인가?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가장 많이 하신 것은 무엇인가? `말씀 전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말씀으로 병도 고치셨고, 이적과 기사도 말씀을 통하여 행하셨다. 더군다나 가르치시는 모든 것도 말씀으로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분을 붉게 표시한 성경을 보면 공관복음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기준과 원칙으로 말씀과 행동을 하셨을까? 예수님의 삶과 행동의 일관된 원칙이 무엇인가?
그 원칙이 바로 예수님의 삶을 특징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직접 말씀하셨다.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은 그 분이 하시는 모든 말씀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셨다. 원고 쓰듯이 미리 준비하거나 암기해서 한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다 아버지의 하신 말씀이라고 당당히 말씀하신다.
(요14장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 이니라”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한사람의 병자를 찾아서 사흘 길을 가실 적이 있는 반면에 몰려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두고 그냥 떠나기도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날의 컨디션 때문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병자들을 두고 다른 동네로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어떠하셨까? 미안한 마음이나 아쉬운 마음이 있으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다른 동네로 가라고 하시면 주저 없이 즉시로 다른 동네로 가셨다.
또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다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명령하여 주신 것을 듣고 하신 것이다.
(요12:50)“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하셨다.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말씀하셨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이다.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그 모습이 예수님의 삶의 특징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3장에서는 충성의 모델로 예수님을 말씀한 것이다.
Ⅲ. 진품 충성(忠誠) 유사품 충성(忠成) 마태복음7:22-23절
하나님이 보시는 충성은 마음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 자체만으로 그것이 충성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한 행위를 하는가? 라는 마음의 동기를 보신다.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얼마든지 외식적으로 근사하고 충성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더 깊은 마음의 동기를 보신다.
진품 충성은 그야말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유사품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 버린 충성이다. 즉 "자기 마음의 중심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품인지 아닌지는 하나님과 나만 아는 문제이다. 아니면 나중에 어려움이 와서 그가 누구 탓을 하는지를 보면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진품과 유사품을 구분하지 못하고, 다 "충성`이라고 말한다. 유사품이냐, 진품이냐는 나중에 판가름 나게 되어 있다. 그것을 잘 지적한 말씀이 마태복음7:22-23절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말씀하는 그날은 마지막 심판 날이다. 그때 예수님 앞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아주 친한 척 아는 척 하면서 주여 주여 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하는 일을 자랑한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한 사람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주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귀신을 쫓아냈다는 굉장한 사실이다.
또 다른 무리들이 예수님을 아는 체한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않았습니까?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놀랄만한 기적을 행한 사람들이다. 불의 종, 능력의 종, 기적의 종이라는 호칭이 늘 이들의 이름에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 날에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주여 주여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이 당연히 자기들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이 땅에서 하듯이 예수님 앞에서도 이렇게 친한 척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분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상상을 초월한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밝히 말씀하신다. 대충 말씀 하지 않으시고 밝히 말씀 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불법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법인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자자 노릇한 것이 불법인가? 아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 불법인가? 아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 행한 것이 불법인가? 아니다.
마7:22-23절에서 말하는 불법의 문제는 누가 시켜서 했느냐 이다. 누구의 명령으로 선지자 노릇했으며, 누구의 뜻을 좆아 귀신을 쫓아내며, 누구의 음성을 듣고 권능을 행했는가가 문제이다. 이것이 충성의 문제이다. 이것이 진품인가? 유사품인가?의 문제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시는 일, 귀신을 쫓는 일, 권능을 행하는 일을 행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명령하시는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셨다. 이것이 충성이다.
우리가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마음대로 자기의 유익 위해서 권능과 은사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 충성 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한 것이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자기 의로 행한 유사품 충성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밝히 말씀하신다.
체면 때문에 주님께 충성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이것도 유사품이다. 자기 직분이나 위치 때문에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유사품 충성이다. 그러한 유사품 충성이라면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내가 얼마나 많이 고생했는데요. 또 내가 얼마나 많이 거기에 투자했는데요” 하더라도 주님께 인정 받지 못할 것이다.
충성에 대해서 연구하면 할수록 내 인생의 많은 부분들이 유사품의 충성들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많이 회개 했다. 회개하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왕 충성하고 살거라면 유사품말고 진품으로 충성하며 살도록 기도하자.
Ⅳ 결론: 우리가 명심해야 할 두 가지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고 사는 것인가? 내가 나를 되돌아보니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에 가장 방해가 되는 장애물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내 안에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마음, 높아지려는 마음 등 교만이 있어서 하나님앞에 충성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이 장애물을 넘어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것들을 깨닫게 해주셨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두 가지를 명심하면,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을 사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1)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 -주님보다 앞서지 말라.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 당시의 문화에 따르면 그곳은 먼지가 많아서 발이 쉽게 더러워진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면 종들 중에 제일 서열이 낮은 종이 물을 떠다가 주인이나 손님들의 발을 씻긴다. 그런데 열두 제자가 ‘선생’또는 ‘주(主)’라고 부르는 그분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은 놀라고 황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은 왜 이런 행동을 하시는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요 13:14-17)
다시 말하자면,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주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서 “진실로 진실로”하고 결론을 말씀하시는데, 신약에서 ‘진실로’라는 말이 두 번 나오면 무조건 밑줄을 쳐야 하는 중요한 말씀이다.
“제자로서, 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것을 늘 알고 행해라. 그래야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이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는 말의 의미는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크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발을 씻기신 예수님보다 더 높아지려 하거나, 더 대접받으려 하거나, 더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아예 갖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야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서 해석해 보면, 종으로서 주인보다 더 커지려고 하고 더 인정받으려고 한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명심하면서 제자로서, 종으로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살아야 한다.
나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하려면 항상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섬기는 지도력’은 스스로 인정받고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다. 보내심을 받은 종이며 나를 보내신 주님보다 더 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내 자리는 예수님처럼 발 씻기는 자리임을 명심하고 행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2) “나는 무익한 종이다”
교만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계속 충성하는 비법이 또 하나 있다. 이 말씀 역시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은밀히 하신 말씀이다.
오늘의 본문말씀인 누가복음 17장 7-10절이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7-10)”
제자들에게만 하신 이 말씀은 다른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때는 노예 제도가 있었기에 ‘종’이 누군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다 알고 있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다.“종이 있는데 하루 종일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저녁 때 돌아왔다. 그 때 주인이 그 종에게 종일 수고했으니 와서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그럴 주인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주인은 주인이고 종은 종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주인은 종에게 저녁 때가 됐으니까 밥상을 차리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치우고 나서 먹고 마시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종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이러한 것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주님이 또 물으셨다. “밭을 갈고 양을 치고 그 후 저녁 차리라는 명령에 순종했다고 그에게 사례하겠느냐?” 당연히 안 할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비유를 이해 못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명령을 하신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이것이 제자로서 늘 가져야 하는 태도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비결이다. 그것을 지금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다 순종한 후에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좀 너무한 것 같아도 잘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무익한 종’이다. 마치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믿음이나 나의 능력 때문에 일어나는 양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죄 가운데 죽어 마땅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더 착하고 성실한 다른 사람을 일으켜서 쓰실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예수님이 ‘이와 같이 너희도 …하라!’고 하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충성된 종으로서 나는 하나님이 나를 쓰실 때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고백해야 한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때까지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어떤 일을 순종하고 이렇게 입으로 고백한 적이 있는가?” 생각해 봤는데 놀랍게도 한 번도 없었다. 나 역시도 뭐 하나 행하고 나면 꼭 그것 때문에 마음이 높아졌다. ‘와! 이거 내가 했네.’ ‘오늘 강의에 기름 부으심이 넘치다니, 대단한데!’
그럴 때마다 나는 주님의 명령대로 고백해야 계속해서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무익한 종일 뿐이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모든 영광 주님 홀로 받으소서!”
이와 같이 하나님이 나를 쓰실 때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면 나는 계속해서 충성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하신 이 명령을 늘 명심 하실 때 주님 오실 때까지 충성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