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생애에 최고의 뉴스를 기다리며 산다. 그렇다면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기다리는 최고의 뉴스는 과연 무엇일까?
인간이 가지는 공통적인 행복은 내가 누구에겐가 사랑받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인간의 한계로 인해 점차 퇴색되어 갈 뿐이다. 그런데 여기 세월이 가도 퇴색되지 않는 사랑, 더 깊어지는 완전한 사랑이 있다. 오늘은 바로 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이야기, 즉 성탄절 소식을 증거하고자 한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러브스토리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목숨을 건 가슴 아픈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최고의 굳 뉴스이다.
Ⅰ. 본문 연구
1. 10 “온 백성에게 미칠”
여기 온 백성은 지구 상에 사는 모든 남녀, 성별, 재산, 명성, 사회적 지위, 교육, 문화와 역사를 초월하는 전 시대, 전 영역에 걸쳐서 이 소식이 미친다는 말이다. 이 소식은 어린아이에게도 공산권에서도 가장 좋은 뉴스이다.
2. 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이 세상에도 기쁨이 있다. 돈도 기쁨이 되고 건강도 기쁨이 되며, 명예도 인간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 모두는 다른 한 면에서는 해가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소식은 기쁨만이 되는 소식이다.
3. 11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이 말은 오래 전에 다윗 왕의 위를 이을 약속된 메시야께서 오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 `영광과 평화`, `하나님과 사람들`, `지극히 높은 곳과 땅`으로 상관하고 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을(죄인) 찾아 오신 사건이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이다. 모든 이방 종교는 사람편에서 스스로 신을 만들어 놓고 또 사람 편에서 스스로 신을 찾아가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아오신다.
처음 사람 아담이 범죄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떠나 죄와 그 열매인 사망가운데 살았다. 그 때도 하나님이 먼저 찾아가셔서 그를 다시 세우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요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태어나서 내가 부모를 알지 못할 때 이미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부모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나를 키운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인도해 주셨다. 바로 나를 찾아오신 이 하나님과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죄와 저주에서 구원을 얻지만, 그 사랑을 배척했을 때 심각한 결과가 온다.
Ⅱ.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
P. Draker는 96세로 서거한 경영학과 미래학의 대가이다. 그가 13세 때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이다. “죽은 다음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느냐?” 그는 96세가 되어서도 나는 지금도 그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이 50세가 되었어도 아직도 그 대답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가 설정한 대답을 위해 준비하는 삶이 아니라면 문제가 있다.
그의 책 Next Society라고 하는 책 중에 이런 제목이 나온다. `미리 가 본 미래` - 미래를 미리 가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생기겠는가? 미래는 반드시 현재로 다가온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미래는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 현재는 반드시 과거의 뒷전으로 밀려간다. 그리고 미지의 불확실한 미래가 현재로 나타나게 된다.
운전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방을 주시해야만 한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잘했어도 못했어도 지난 일은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과거는 과거로서 접고 우리가 봐야할 곳은 미래이다. 과거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므로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그 시간이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9: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생각이 없이 하는 일은 되는 일이 없다. 생각, 기억해야 된다. 요즘 현대인을 가리켜서 쿼터리즘이라고 하는 말을 쓴다. 쿼터리즘이라는 말은 짧게 생각하고 빠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책을 볼 때에도 한 페이지를 다 읽지 않다. 몇 줄을 보고는 알았다고 넘긴다. 한 권의 책도 그저 몇 장을 넘기고는 다 안 것처럼 넘겨버리고 만다. 연애를 해도 옛날에는 1년 2년 심지어는 10년씩 길게길게 연애를 했지만 요새는 세 번 만나보면 끝난다고 한다. 속전 속결이다.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아도 한 테마를 설명하는 데에 옛날에는 한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15분, 이 quarter란 말이 1/4을 뜻하는 말이다. 한 시간이 1/4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quarterism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보다 더 멀리 생각하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큰 결점이다.
문제는 다가오는 미래, 이 결정적 미래는 반드시 생각을 해야 된다.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것을 생각하라" 하고 말씀하신다.
생각이란 세 차원에서 설명한다.
1. 전망이라고 하는 생각 Perspective, - 미래 중심적 생각 소망 - 바라는 바이다. 우리의 기대, 갈망이 있다. 비전(vision)은 시력, 통찰력, 관찰력으로 번역된다. 즉,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시계에는 한계가 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안으로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 곧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우주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전은 육안과 지안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심안 및 영안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과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볼 수 있다. 10년 20년 100년 후의 자기모습, 가정상태, 민족의 앞날을 그려볼 수 있다. 이렇게 비전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명확히 보게 하며, 신념을 가지고 보이는 비전에 자신의 육체적, 지적, 정신적 및 영적인 힘을 집중시켜서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해준다. 명학한 비전을 가진 사람은 긴 안목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이끌어 갈 수 있다.
빌립보서 3장 13,14절에는 바울이 ‘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천국을 보았다.
그 영광 안에서 예수와 함께 사는 축복을 보았다. 동시에 예수를 모르는 자들의 저주와 비참함과 사망의 형벌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목숨을 걸고 생명을 전해 주고자 힘쓰게 되었다. 이렇게 비전을 가진 사람에게는 시간이 역류한다.. 과거- 현재 - 미래 흐름이 아니라 미래 - 현재 - 과거의 순서로 흘러간다. 왜냐하면 미래의 비전이 오늘을 작동시키고 오늘의 행위는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전이 내 마음에 있을 때 나는 그 비전을 그림으로 그리게 되고 그것은 내 가슴에 화인처럼 박히게 된다.
2. 깨달음이라고 하는 생각 - 현재 중심적 생각 깨달음이라고 하는 생각은 현재에 있는 것이고 또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 의미를 생각하고 기뻐하는 그런 생각이 있다. 진정한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진정한 집은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물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다. 기적은 지금 이 순간 푸른 대지 위를 걷는 것 지금 이 순간의 평화와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이다. 평화는 우리 주위 모든 곳에 있다. 이 세상에, 자연 속에, 그리고 우리 안에, 우리 몸에도 정신 속에도 그 평화와 만나는 법을 배우는 순간 우리는 치유되고 변화한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닌 수행의 문제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금 이 순간 속으로 데려오는 길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우리는 새롭고 경이롭고, 우리를 치유해 주는 것들과 만날 수가 있다. - 틱 낫한, 마음을 멈추고 다만 바라보라.
3. 후회 라고 하는 생각 - 과거중심적 생각이다.
지나간 다음에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현재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미래는 더더욱 없고 꼭 지나간 다음에야 `그랬으면 좋았을 걸, 그랬으면 좋았을 걸` 이라고 생각한다. 꼭 지나간 다음에야 생각을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건을 사오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물건 사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하는데 꼭 사 가지고 와서 후회를 한다. 그리고 바꿔온 후에 또 후회를 한다. 산 다음에는 생각하지를 말아야지 그것을 가지고 와서 또 무르자 또 바꾸자하면 그것은 사람이 처절해 진다. 생각이 뒤에 가서는 안된다. 그런데 자꾸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을 한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 뮤지컬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뮤지컬인데 가룟 유다의 독백 -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고 죽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죽었다가 혼령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혼령이 슬피 울면서 울부짖다. 울부짖는 제목이 무엇인가 하면, "Why didn`t you tell me?; 왜 당신은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다고 왜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제가 알았다면 제가 왜 예수를 팔았겠습니까?" 이렇게 슬피 운다. 저주받은 영혼이 울부짖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후회이다. 지나간 다음에 뉘우쳐도 도리가 없다. 후회라는 고통은 인간이 겪는 가장 무거운 구제 받을 수 없는 고통이다. 후회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에 대해서 듣지 못해서 후회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우리 인생은 길어야 7~8십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미래가 있다. 오늘 성탄절 주님이 여러분의 그 미래를 열어주셨다. 그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서 잃어버린 권리를 회복할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이 시점에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Ⅲ.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가시고기는 물고기 중에 둥지를 지어 알을 부하하는 유일한 어류이다. 길이가 길어야 7~8센티 정도이며 작은 것은 5센티쯤 되는 작은 물고기이다. 이 고기가 새끼를 위해 바치는 사랑은 인간이 흉내 내기도 힘겨운 것들이다.
아비 가시고기는 어미 가시고기가 둥지에서 산란을 하는 동안 그리고 알에서 깨어 나오는 십오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둥지를 지킨다고 한다. 혹여 적의 공격을 받을 새라 더위에 목숨을 잃을 새라 붕지를 향해 일초도 쉬지 않고 지느러미와 입을 사용해서 둥지에 산소를 불어 넣는 일을 한다. 이 지극정성의 보살핌으로 새끼가 알에서 나와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때쯤 이미 탈진하여 새끼 둥지 옆에서 죽고 만다. 아비 가시고기의 사랑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새끼 가시고기는 죽은 아비 가시고기의 살을 뜯어먹으면서 성장한다. 그래서 흔히 가시고기를 부성애를 비유할 때 예로 들게 된다. 가시고기의 이야기는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낳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 가시고기의 이야기는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시고기 사랑의 완성표이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분의 사랑을 믿으면서 산다. 그러나 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음모와 반역을 일삼는다. 마치 가시고기가 아비의 살을 먹고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여전히 예수님의 실과 피를 먹고 살아간다.
무엇이 인간됨을 회복하게 할 것인가? 우리는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랐다. 스승을 통해서 유익한 것들을 배우며, 이성을 통하여 사랑을 배운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인해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회복해 가는 것이다. 살면서 사랑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가치를 알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생명을 얻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