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면 어떻게 성공적인 대학생활을 할 것이냐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한다. 또 각 과목마다 첫 시간에 하는 것은 그 수업에 대한 정의와 공부의 방향과 목적에 대한 소개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인생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교육을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기능이 있다. 지적기능, 감성기능, 영적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이 다양한 기능이 한 사람 안에서 조화로워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성적 기능을 매우 귀중한 가치로 여겨서 어릴 때부터 지적기능을 개발시키는 일을 우선시 한다. 그러나 살면서 중요한 것은 감성이다. 또 감성은 인간관계를 갖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더구나 인생의 중요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영적인 기능이다. 그리고 삶의 방향과 목적을 모르는 지적인 기능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교육에서 감성이나 영성교육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지적인 교육을 시켜야 순서상 바르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감성과 지성을 다루는 부분을 다르게 만드셨다.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가 있다. 좌뇌는 수와 논리를 담당하고, 우뇌는 감성을 담당한다. 그리고 좌뇌는 4-5세가 지나야 발달하지만, 감성은 태아가 2개월만 되어도 느낀다고 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감성이 지성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개 우리 가정에서는 영성교육도 없고, 감성교육도 없이 지성만을 강조하다가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한다. 이 거꾸로 된 교육이 여러 역기능적 반응을 하도록 한다. 이 모든 잘못된 삶에서 바른 방향을 잡으려면 참된 자아를 찾는 일, 즉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의 목적과 방향설정이 중요하다.
오늘 본문은 인생의 참 목적을 알게 하시는 왕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Ⅰ. 당시의 시대적 상황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불신의 시대, 믿을 수 없는 시대라고 표현한다. 본문 말씀도 매우 불안하고 암울한 상황을 우리에게 묘사해 주고 있다. 모든 백성들이 실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인 상황이다.
1)디베료 가이사-가이사 아구스도를 이은 로마의 제2대 황제이다. 그는 의심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고,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행여 자기의 황제자리를 빼앗길까봐서 자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잡아 죽였다. 아들과 조카를 잃고 통곡하고 있는 여인을 붙잡아 처형하면서 이 여인이 반란을 꿈꾸고 있다고 죄명을 씌워서 죽였던 살인적인 황제가 디베료 가이사였다. 그는 결국 자신의 시위대장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2)본디오 빌라도- A.D26-36년까지 유대의 제 5대 총독으로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철학이 없고 주관이 없는 매우 불확실한 정치가였다. 성격은 잔인했다. 그러나 뒤가 무른 유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뇌물을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예수님을 재판할 당시에 처음으로 무죄로 판결했지만, 행여 민요가 일어날까 해서 자신의 정치 생명이 짧아질까 두려워서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준 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 일신상의 안일을 위해서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 했던 정치꾼이다.
3)헤롯왕-이스라엘 땅을 지배했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원명은 헤롯 안티파스이다. 그는 아켈라오의 친형제이며 헤롯 대제의 아들이다. 갈릴리 지방을 다스렸던 왕이었고, 에수님께서 여우라고 표현했던 왕이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이다. 그는 로마를 방문하는 중에 자기 동생인 빌립의 집에 들렀다가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간통을 하고 술수를 써서 그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빼앗아 버린다. 게다가 이를 책망했던 세례요한의 목을 잘라버렸던 간악한 왕이었다.
4)당시 유대지방의 종교적 지도자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였다. 로마정부가 세운 어용종교인이었다. 안나스는 봉직 기간이 길었고 권력과 영향력이 산헤드린에 강력하게 미쳐, 그는 이스라엘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야바는 또한 안나스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 이유로 공식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안나스가 행사했다.(요18:13-29)
이러한 정치적상황과 종교적 지도자들 아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얼마나 암울한 시대를 살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희망이 없는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다. 좌절 가운데 있는 절망적인 시대, 그 역사의 현장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셨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생각있는 사람들, 식별력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절망할 수밖에 상황이라할지라도 실망하지 말자. 왜냐하면 주님이 바로 그런 비참한 상황속에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Ⅱ. 왕의 길을 예배하라.
요한은 이런 시대에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보내심을 입은 사람이다. 왕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요한의 사명이었다.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이 오실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일이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배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선포했다. 회개는 구체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거짓된 삶에서 진리가운데로 돌아서는 것이다. 삶이 바뀌는 것이다. 교회에 오래다녔어도 왕의 길을 예비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 진리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행복하다고 해서 진리는 아니다. 포스터 모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절대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객관성이 없고 모두가 서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 진리이다. 신앙마저도 절대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기 때문에 객관적인 기준, 심판의 기준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돌이켜야 하는가?
1)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열등의식
열등의식은 무능함과 적합감의 상실이다.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이상한 행동한다. 쉽게 당황하거나 짜증을 잘 내고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과의 비교를 참지 못한다.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한다. 열등의식은 자기가 원하는 수준에 미달된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거절을 많이 당하면 “나는 사랑도 못받고 또 원치 않는 아이인가보다” 라고 생각해서 열등감이 형성된다. 너무 잦은 체벌도 마찬가지이다. 체벌은 “너는 네게 부여된 기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어. 너는 우리 기대에 어긋나고 있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열등감을 극복하게 하는 비결은 흥미를 갖는 영역에서 충분히 칭찬을 하고 남들보다 앞 설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통해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는 메시지를 듣도록 해야 한다.
짐 답슨이라고 하는 가정사역자가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남편과 아이가 있는 가정주부들을 대상으로 현재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가하는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95%가 낮은 자존감(열등감)을 나타내는 “나 자신에 대해 무가치함, 나는 별로 쓸모가 없어! 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런식의 열등감은 예수 안믿는 사람이 80%, 믿는 사람도 50%에게서도 나타났다.
데이빗 씨멘즈는 이렇게 영적으로 말한다. “사탄이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좋은 무기는 열등감이다” 열등감은 인간의 잠재력을 마비시킨다. 나는 못해, 두려워, 할 수 없어. 이 감정을 극복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성경은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인정해야 한다. 예전 사회학에서는 35세가 넘으면 새로운 것을 시작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에는 80세에 모세를 부르셨고, 130세의 야곱은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자녀를 축복하는 사명을 다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내는 골짜기를 메우는 일이다. 골짜기가 메워지지 않으면 이 산과 저 산이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지나친 자기 비하, 열등의식은 나와 이웃과의 간격을 낸다. 부모와 자녀, 부부 사이에 나 있는 골짜기로 인해 마음이 통하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음으로 인해 말이 왜곡되게 전달된다.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성경적 조명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할 때 이 골짜기는 메워질 것이다.
2)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교만이 꺽임
교만은 산처럼 높아서 시야를 가린다. 특히 교만은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에 대해서도 볼 수 없다. 이 교만은 거짓과 술수로 가려져서 상황에 대한 판단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이교만이다.
[시31:23]“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화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니라”
[잠16:18]“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대개 구약시대에 심판은 유황불이나 지진, 전쟁, 혹은 기근, 질병 등의 심판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심판의 상징인 바벨탑사건은 교만에 대한 심판이다. 이 심판의 특징은 다른 심판과 달리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말하자면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은 말이 안통한다. 말이 안통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고립되게 되어 있다. 말이 안 통하던 이 역사 안에 말이 통하는 역사를 일으킨 사건이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이다. 성령이 오시면 언어가 소통이 된다. 그것이 초대교회에서 방언으로 나타났다. 오늘날도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메시지와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이다.
과거에는 win-lose구조였다. 이 구조는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다’는 구조이다. 이 구조는 기술사회의 특징이다. 내가 항상 일등이어야 하고 그래야 살아남는 구조이다. 그러나 현대는 win-win시대이다.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긴다’는 나도 살고 남도 사는 구조이다. 정보화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는 창의력을 중시하고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이다. 즉 다함께 사는 사회이다.
비행기에 새가 날아들면 누가 이기겠는가? 이것을 ‘조류충돌’이라고 하는데 모두 비행기가 이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비행기 엔진에 새가 들어가서 고장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항공회사마다 ‘조류충돌’로 인해 드는 고장 수리비가 엄청나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도 사소한 것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는 ‘조류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서로 돕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3)굽은 것이 곧아지고- 거짓된 삶이 진실된 삶으로
거짓말에도 여러종류가 있다고 한다. 단순히 상대방을 기분좋게 하려는 좋은 의도의 거짓말에서부터 악한 의도의 거짓까지 여러 종류의 거짓이 이 땅에 존재한다. 그러나 일단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 한 가지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일곱가지의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한다.
프란시스 후꾸야마라고 하는 사람이 쓴 “트러스트(TRUST)" 라고 하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국력, 경제력, 그것은 그의 자본과 기술 그의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그 문화적 요인, 즉 사회적요인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신뢰성이다. 얼마나 서로 믿는 사회인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인가? 믿을 수 있는 관계인가에 따라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신뢰가 지식이나 경제보다 앞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부 잘하는 것보다 먼저 정직성을 가르쳐야 한다. 계시록 22장에는 지옥간 사람들의 특징이 나온다. 거짓말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구절이다.
[계22:15]“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4)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거칠고 투박한 삶이 부드럽고 온화한 삶으로
교육학에서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것이 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교수가 이런 실험을 해보았다. 젖 먹는 원숭이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었다. 하나는 철사로 ,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 각 원숭이의 가슴에 우유병을 메달았다. 처음에는 두 군데를 다 갔으나 나중에는 모두 천으로 만든 원숭이에게만 가서 우유를 먹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동물도 따뜻함을 원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원한다. 비판하는 마음,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마음, 정죄하고 남의 허물을 들춰내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옆에는 사람이 가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신 빛이시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시작된 사람도 빛을 발하게 되어 있다. 자연스레 그리스도를 닮게 되어 있고, 변화되는 것이 복음의 역사이다.
Ⅲ.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6절 말씀은 복음이 들어간 결과에 대해서 말한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고 말씀하신다. 구원은 영적인 것이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사52:10]“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라고 말한다.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향해 메시야됨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마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불신자전도는 내 삶 속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으로 전도해야 하고 관계 속에서 전도해야 한다.
필리핀의 공산주의자 조지라고 하는 젊은 청년의 이야기이다. 공산주의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한 청년이 형무소에서 형을 살고 있다가 심심해서 성경을 잃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의사에게 가서 진단을 해달라고 해서 진찰을 했으나 전혀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 청년의 고백은 내 속에 이글거리던 증오와 복수심, 분노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
복음은 울퉁불퉁하던 산들을 메우듯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주고, 거친 삶을 젠틀하게 하는 등의 구체적인 변화가 있게 한다.
우선 내 자신이 왕을 모시고 있는지 돌아보자. 그 분이 내 삶속에 들어오신 후 내게 뭔가 달라진 간증이 있는가?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나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서 저 사람을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게 분명해! 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복음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05년도 성탄절에는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진정한 생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성탄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