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비젼트립 소감문
3진 박분희 집사
캄보디아는 지금까지 친한 친구가 8년 동안 선교사로 있는 땅입니다. 그래서 꼭 시간을 내어서 가고 싶었는데, 김민희 집사님께서
집사님 부부 이번에 캄보디아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꼭 가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겼습니다. 제 작년 희망의 학교를 다녀온 예은이,
예빈이도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남편과 일정을 맞추어 보았는데, 그 때가 남편은 회사에서 개발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막바지 단계여서 기도로 준비하였고 극적으로 프로젝트를 금요일까지 마무리를 하고 무사히 다녀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이 개인적으로 해외 단기 선교로는 3번째가 됩니다. 첫 번째는 청년시절 해외여행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필리핀 단기 선교를
다녀왔고, 두 번째는 결혼해서 예은이를 임신하고서 남편과 함께 교회 성도들을 데리고 태국 북쪽 치앙라이 주에 있는 산족 치앙마이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철야 때 파송선교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할 때 사정을 정확히 모르니 막연하였고 그 곳에 가서 처음해보는 페인트
봉사를 해야 한다고 하니 다른 분들에게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 은근히 걱정도 되었습니다. 출발 일주일 전 함께 모여 비자와 입국서류도
미리 작성하고 아이들에게 줄 선물들과 LED 전등을 집사님들이 포장하시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은 이미 친구가 있는 캄보디아 그리고
희망의 학교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친구 선교사에게 줄 물품들 미숫가루, 멸치,김, 비누, 카누 교회 학생들에게 줄
선물들도 준비하였습니다.
첫날 희망의 학교 문을 들어서니 정말 둘째 예빈이가 말한 것처럼 그곳의 선생님들과 방학이라 학생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두 손을 모아
활짝 웃으며 우리 단기 선교팀을 맞아 주었습니다. 임만호 선교사님께서 우리팀에게 학교의 연혁들과 아들 요한이의 묘지 앞에서 그간의
사정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얼마 전 요한이의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 졌는데, 장면 중에 트럭 운전사가 요한이를 치고 다시 돌아와서
치고 도망가는 상황을 뒤늦게 아시고 선교사님은 그 동안 충분히 용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시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용서가 참 힘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같은 부모의 심정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엄청난 일을 겪으시고 힘든 시간들을 용서와 사랑으로
섬겨오신 두 분을 뵈니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는 첫날부터 매일 예배로 시작해서 예배로 마쳤습니다. 예배시간 동안 읽은 사도행전과 에베소서의 말씀은 긴 여정 동안 우리의 길에
빛이요 등이었습니다. 첫날부터 각자 배정을 받고 모두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십자가 LED 설치, 교실 LED 등 교체, 기숙사 페인트
작업. 우리는 4가족이 참석한 민우네 가족과 한 팀이 되어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2,3층의 페인트 칠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 3층의 정리가 안된 방의 짐들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벽을 사포질 하고 그러나 많이 어설펐습니다. 그 사이 오동철 장로님과
십자가 LED 설치 팀이 거의 5층 건물의 지지대를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래에서 보기에 아찔하였습니다. 그 지지대를 올라가는 장로님의
모습을 보면서 여호수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졸업식에 축가로 불러 줄 캄보디아어 특송을 힘차게 연습했습니다.
둘째 날, 드디어 2회 졸업식이 시작 되었습니다. 졸업식을 위하여 천막을 쳤는데 산들 사람이 사방에 불어와 밖은 더운데 천막 안은 선선하였고
그 안에 이미 학부형들과 초등 1학년부터 중등부, 고등부 3학년 졸업생까지 이미 자리에 가득하였습니다. 모든 순서가 감동이었습니다.
권순화 장로님의 기도, 박정훈 목사님의 설교 그리고 특별히 임만호 선교사님의 격려사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진실 되었고 캄보디아 땅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심이 마음 가득 전해져 왔었습니다. 그 귀한 말씀을 잠깐 옮기고 싶습니다.
“여러분! 살아야 합니다. 살아야 합니다. 저는 참 많이 어려웠습니다. 비가 오면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몸이 좋지 않아 약을 먹어야 합니다. 하루에도 약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생각합니다. 나에게 희망은 여러분입니다.
우리 요한이가 졸업생 중에서 맨 앞에서 기타 치며 찬양했었던 ‘논 다라’와 많이 닮았습니다. 참 잘 생겼었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견뎌야 합니다. 살아야합니다. 할 수 있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서 캄보디아를 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희망입니다. 60년대는 일본보다 더 아름다운 나라였습니다. 한국이 어려울 때 쌀을 보내주었습니다.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입니다.
캄보디아는 위대한 나라입니다. 여러분은 캄보디아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나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졸업생 일어나주세요! ‘아자! 모이띠바이!’“
처음 캄보디아 이 지역에 왔을 때 아이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신발조차 신지 않았었고 언제가 한 엄마가 학교에 오셨다 가곤 하였는데, 자신의
아이가 죽었는데 사진이 한 장도 없어서 아이의 사진을 보기 위해 학교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고,
그 때부터 어떤 후원자의 도움으로 매년 전학생 모두에게 사진을 찍어주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그 사진들을 받아 가는 아이들의 함박
미소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임만호 선교사님과 김효선 선교사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을 몸소 삶으로 실천하시는 분들이셨습니다. 그 분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족식을 할 때는 단기 선교팀들도
졸업생들도 어느덧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단기 선교팀에서 의무팀을 맡고 보니 아프거나 힘들어 하시는 분들을 뵈면 신경이 쓰였고 약국에서 사온 비상약으로 (방을 노크해 오시면)
마치 전문가처럼 처방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그 날은 모두가 힘들었던 날로 기억합니다. 종일 열심히 일하셨던 김민희집사님이 더위에
과로까지 하셔서 급체를 하셨습니다. 순간적으로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아야하나 의사선생님을 찾아야 할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1층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바늘을 찾아 갔다가 낮에 보았던 의료팀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호텔에 묵으시던 충남 의료봉사팀의 의사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처방을 해주시고 링거까지 맞혀 주셨습니다. 그때 내가 진짜 의사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님들의 중보기도로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경험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희망의 학교 학생들과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이곳에 선교지를 정하시고 학교를 세우시고 오랫동안
묵묵히 섬겨 오신 많은 수고와 사랑의 손길들이 합하여 그 분들의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날씨가 몹시 덥고 고온이라
조금만 일해도 지치고 땀으로 번벅이 되었지만 어느 한분도 불평하지 않으시고 최선을 다하시는 선교팀을 뵈며 너무나 한 분 한 분 소중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일주일 동안 함께 식사하고 일하니 이미 주님 안에서 한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엄마가 캄보디아 다녀와서 더 예뻐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나눔과 섬김에서 오는 기쁨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철야 때 희망의 학교와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할 때, 막연하지 않고 직접보고 경험하였기 때문에 더욱 깊이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00명이상 되는 학생들에게 필요에 따라 도움을 주려면 더 많은 분들의 관심, 물질후원과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않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우선을 두는 우리 생명샘교회가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끝으로 부족한 우리 부부에게 귀한 섬김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과 중복 기도 해주신 온 교회와 단기 선교팀에게
감사드립니다. 캄보디아 희망학교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과 하늘을 당분간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참 행복했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