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나눔

2012년11월30일 김동원청년간증문

작성자 관리자 날짜2012.12.02 조회수893




안녕하세요? 영어 예배부 김동원 다윗 김입니다. 항상 금요일 철야때 여러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저도 준비가 돼 있을 때 간증을 하고 싶었습니다. 영어예배에서 간증했었지만 이 자리에서 꼭 제가 받은 은혜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1991년도에 미국에 6-7살 때 즘에 미국 로스앤절러스로 이민 가서 작년 921일에 한국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제 한국말 발음은 미국에 오래 살다 온 사람 같이는 않아서 오해를 하실 수 있습니다. 저번에 약국에서 제가 말을 더듬어서 약국 아줌마가 이렇게 저에게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멀쩡하게 생겼는데 왜 말을 바보같이 해요?" 황당했지만 "미국에서 온 지 별로 안돼서요" 라고 설명해드리는 것 보다 "제가 장애인이였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말 하시면 안 되시죠" 라고 말했을 때 나 자신이 주님을 통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많은 단어를 이해 못 하고 한국말로 회화를 하는 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어색하게 말하는 부분이 있어도, 맞춤법 많이 틀렸어도, 놀리지 마시고 재미있게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박 목사님 설교도 한 60% 밖에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설교 하실때 저는 눈을 마주칠때 마다 무섭습니다. 박 목사님이 저에게 "동원아 이해해? 내가 말한거 무슨 뜻이야?" 라고 물어볼가봐요. 저번에 제가 질문을 이해를 잘못해서 엉뚱한 대답을 했다가 박모사님이 "오 주여 이 청년을 도와주소서" 하셨을때 너무 창피했다. 그래서 저는 점점 멀리 앉게 되고, 또 목사님이 저에게 또 질문을 물어보실까봐 영어로 된 선갱책과 사전을 꼭 들고 와서 박 목사님에 설교에 집중을 200% 더 했기 때문에 제가 일년동안 샘명샘교회를 다니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주님을 통해서 많이 바껴진것이 오늘의 간증 포인트 입니다. 한국에서 제 어린 시절은 아주 짧았지만,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외삼촌이랑 롯대 월드에서 매미를 잡으며, 배트민트, 야구, 축구, 등 그리고 어린이 대공원에 매주 마다 놀러 가서 사슴, 호랑이, 원숭이 등 먹이 주면서 놀았습니다. 그때는 이것이다 저에게 미국에 디즈니랜드 였습니다. 롯대 월드에 하도 많이 가서 롯대월드 버스 기사님이 무슨 애가 매미 구제업자라며 화를 내신 적이 있고, 어린이 대공원 직원들은 다 제 이름을 알 정도였습니다. 91년도에 텍사스에 가서 얼마 안돼서 저의 부모님은 이혼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저의 어머니는 LA로 둘이 손잡고 룰루랄라 하면서 American Dream, 미국에서 꿈을 이루자 하면서 이사를 신 나게 갔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붕어빵처럼 닮았었고,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LA에 이사 간 지 몇 개월 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1992년도에는 LA 폭동이 한인 타인 중심에 일어났었습니다. 어린 애한테는 롯대 월드에서 매미 잡는 것 보다, 어린이 대공원에 가서 사슴에게 먹이 주는 것 비해서는 LA 폭동은 아주 무서웠습니다. American dream 이 아니라 American Nightmare 악몽이 었습니다. 8살 때 길을 걷다가 갑자기 어느 차가 와서 제 앞에 있는 사람을 총으로 쏴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보호 하려고 피를 흘리며 온 힘을 다해 기어갔습니다. 총을 3번 더 맡고 그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차 안에 있는 멕시칸 갱단 맴버는 저를 보고 조용히 하라는 의사 표시, 입에 손가락을 대면서 차는 떠났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으로 살인사건의 증인이 됐었습니다. 어미니는 부들 부들 떠시며 저를 앉아 주시면서 이게 무슨 일이냐 하면서 저를 밖에 몃개월 동안 안 보내셨습니다. 뉴스에는 맥시칸, 흑인 갱단들이 한인타운에 와서 여자들 남치하고 폭행했다는 뉴스도 많아졌습니다. 저를 예뻐 해주셨던 누나들도 그들에게 당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재일 좋아했던 김아자씨의 피자가게도 불태우고, 제가 음료수를 좋아해서 가끔 저에게 공짜로 음료수를 주신 J형도 쏴 죽였습니다. 사회적 규범 정도는 아니였지만 아는 사람이 이런 아픔과 고난을 당할수 있다는것을 초등학교 3학년때 다 알지 못했더라면 느끼게 돼었습니다. 어렸을때 부터 한국 사람들이 이런 꼴을 당하는것을 봐서 인지 저는 미국에 살면서 애국심이 아주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부터 10학년 까지 교회에 일주일에 적어도 두번가고, 찬양팀에도 섰었고, 착한 모범생으로 잘아 왔었습니다. 어머니도 저에게 항상 긍정적인 얘기 만 해주시고 아주 아름다우신 분이라서 저는 곱게 잘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모든것이 옛날에 말했던 American Dream 으로 가는길 같았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보니 한국 사람들을 괴롭히는 갱단이 많았습니다. 엤날 LA 폭동 사건들이 기억이 났어도, 처음에는 저는 신경을 많이 안썼습니다. 하지만 갱단들은 한국 학생들 (특히 유학생들) 에게 이유 없이 때리고, 침을 뱉고, 돈을 뺐고, 하다가 결국에는 한국 학생들이 자살을 하고, 다시 싸우다가 총에 마져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못 참아서 한국 아이들을 모아 한국 사람 괴롭히는 갱단들 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상대도 안됐죠. 저희는 주먹으로 싸우고 그들은 칼과 무기로 싸우니까요. 어느날 저는 비디오 가게 앞에서 백인 갱단 맴버에게 맡고 있는 한국 아이를 보호 하려다가 머리에 타이어 바꾸는 쌔 파이프 쎄지렛대 로 3번 맞아 죽었다 깨어난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태원 한 후 저는 한국 학생들을 모아서 우리는 갱단 처럼 되지 말고 한인 커뮤니티를 보호 하는 봉사 활동 위원이 대자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도 모르게 이 "봉사 활동 위원" 이라는 것이 150명 맴버로 되서 저도 더 이상 콘트롤를 못하게 됐습니다. 이 학생들이 이제 힘이 생기니까 한국인을 보호 하는 거 보다 이제는 아예 시비를 걸고 있어서 제가 그만 하라고 해도 제 말을 안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더이상 맥시칸, 흑인이 무서운게 아니라 한국인들이 무서워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봉사 활동 조직을 그만 두고 어머니랑 잠깐 2001년도 한국에 나오게 됐습니다. 저는 어렸을때 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가수가 되는게 꿈이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나와 있을때 오디션도 보고 했습니다. 그러자 SM 엔터테인먼트 의 이수만님과 타블로가 저를 스카우트 해서 계약서를 사인하라 그랬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성격이 좋으셔서 너가 하고 싶은대라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저희 교육 때문에 미국에서 영어도 잘 못하시면서 고생하셔서 저는 어머니에게 미국에 다시 가서 하바드 대학에 꼭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이수만님과 타불로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미국에 다시 갔습니다. 솔직히 첫사랑이 미국에 있어서 다시 간 이유도 있긴 합니다만. 어머니는 비자 문제 때문에 한국에 계시며 저는 혼자 택사스주 달라스로 갔습니다. 저는 드디어 정신을 차려서 고등학교에서 저의 모든 과목은 학교에 모범생들이랑 대확 과정 유열 반에 들어가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때 부터 운동을 많이 해와서 학교에서 농구, 축구, 미식축구 팀에서 스카우트 되고, 음악도 즐겨서, 학교와 도시에서 공연도 많이하고, 학점도 좋아서, 하바드가 코 앞에 있는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대학교 들어가면 모두 아시다시피 술 과 파티와 나쁜것들이 기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LA에서 어렸을때 살아서 길거리에서 만 놀았지, 클럽 같은데 안가 봤었습니다. 하지만 달라스에서는 재일 잘나가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서 밤 생활에 빠지기 시작됐습니다. 저의 외로움을 없에 주는 것은 파티 였습니다. 파티를 많이 하게 되다가 달라스에 어느 클럽에 가던 VIP로 들어가고, 노래방도 40-50명식 친구들이랑 노래 하러 가니 너무나 재미있고, 신기하고 이것이 인생이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술을 많은 사람들이랑 마시다 보니, 클럽, 노래방에서 싸움도 많이 일어나고, 담배도 피게 되고, 달라스에서 어느 파티가 있다면 저는 거기 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가끔 다녔습니다. 토요일에 술을 하마 처럼 마셔도 일요일날 술 냄새 품기 면서 예배 드린적도 한 두번 아닙니다. 이렇게 지내니까 또 어머니가 한국에서 혼자 사시면서 걱정하게 돼셨습니다. 얼마나 걱정되고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그러면서 대학교도 제가 다니 다가 말고 음악 하겠다고 일년 쉬었습니다. 파티 만 계속 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랑 전화 통화 하면서 고운 목소리로 "동원아. 너는 착해서 나쁜 사람들이랑 놀면 안되. 우리 언제가는 곳 만나서 다시 행복하게 살아야지" 라고 말했을때 저는 다 큰 남자라고 잔소리 좀 그만 하라고 하며 전화 끓자 마자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파티를 한 기억이 아직도 저를 아프게 합니다. 2005년도 5월달, 어느날 저는 방에서 힙합을 들으며 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노래가 인터넷에 알려져 저스틴 팀벌래이크 와 재니퍼 로패즈의 매니저 귀에 들어가 뉴욕에 와서 사인 하자고 제공이 들어 왔습니다. 옛날에 이수만 님 과 타블로 한테 사인 안하겠다고 한게 후회가 될때 이런 제공이 들어와 기뻤습니다. 하지만 방에서 뉴욕에 가서 랩과 노래하는 준비를 하고 있을때 아버지가 제 방에 들어 오시더니 "이런 원숭이 음악을 당장 꺼!" 하시면서 심각하게 말할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음악을 끄고 "뭔대요?" 라고 물어 보자 마자 아버님의 대답에 저는 온 세상이 무너졌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오늘이 아니라. 어제도 아니라. 한달전에 돌아가셨다 하시던군요. 아버지 만 말고 저희 가족중에서 저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을 할수 있는 사람이 한달 동안 없었습니다. 그 만큼 저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했었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이 없다라고 생각했고, 어머니 까지 저를 버리셨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때에 어리석은 생각 이였지만 그래서 저는 여자를 못 믿게 됐습니다. 어머니도 저를 사랑하신다 그러셨고 언제가는 다시 만날거라고 하시면서 먼저 돌아가셨으니 저는 연예를 하면서도 여자를 잘 못 믿게 됐습니다. 저는 큰 소리를 치며 아버지 에게 난 이제 혼자 살겠다고 울면서 집을 나왔습니다. 처음 일년동안 많이 우울했습니다. 너무 슬퍼서 노래도 만드는데 만들고 들어보면 무슨 인생이 망한 사람 처럼 들려서, 저는 뉴욕에 전화해서 저는 가수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 사람이 가수 되는것은 한두번 기회가 오는것은 아닌데 그때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모든게 다 싫었습니다. 어머니도 없고, 꿈도 잃고.. 월세, 학교, 자동차, 등 제가 다 혼자 내야되서 저는 일을 하루 종일 하고 집에 들어 오면 혼자 밥 먹고, 자고 다음날 또 일하게 됐습니다. 모든것을 이뤄었다 생각했을때 저는 정신을 차리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한국 회사에 취직해서 밑 바닥 부터 일해와서 큰 회사들 한테 인정과 스카우트도 받아서, 돈도 벌게 됐습니다. 그리고 회사 열심히 다니면서 공부도 열심히 해서 드디어 보스턴에 하바드 대학에서 경제 과목을 들게 됐습니다. 저는 자유가 생기고 자신감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부자는 아니였지만 월급도 많이 받고, 좋은 학교도 다니고 있고, 친구도 많고,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제가 어렸을때 사고 칠때 저의 꿈을 이루게 해주실려는 하나님,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제 모든것을 주신 하나님...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하고 하나님이 계셨다면 어머니가 살아 계실텐데라 생각했습니다. 옛날에는 파티를 했었도, 술냄새 품기면서 교회에 갔어도, 이제는 교회가는것은 생각도 안 했습니다. 제가 사회 생활에 빠진 사람으로 변한것이죠. 그러자 어느날 저는 모든것을 이루게 됐습니다. 경재가 어려워서 회사에서 일을 못하게 되며, 집도, 차도, 다 이러 버렸습니다. 갈때가 없었습니다. 가족에게 도움도 요청을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때 처럼 혼자 있는 기분이 였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모든것이 안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믿었던 여자 친구도 제가 아무것도 없어서 떠났습니다. 큰 충격에 저는 인생을 포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갈 때가 없어서 저는 나라에서 주는 장소에 가서 3개월 동안 있었습니다. 거기 안에는 맥시칸, 흑인들 이 많았습니다. 친구들도 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제 자존심 때문에 못 도와줬습니다. 동원이는 넘어지면 항상 일어날거라고 다 믿었기 때문이죠. 한달반이 지난뒤 저는 더 이상 못 견뎌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들며 예수님에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된지는 몰르겠습니다만 제가 혼자서 할려 그랬는데 여태까지 다 실패 했으니, 이제는 하나님에게 다 맏기겠습니다" 라 하면서 저는 매일 찬양을 하며, 선경을 읽으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저는 갑자기 행복해지기 시작됐습니다. 그때 돈이 다 아니다라는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지금 돈도 한 푼도 없고, 학교도 졸업 못하고, 부모님도 없고,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에 들어와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러자 기도를 하면서 비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동원아. 너는 미국에서 내가 기회를 많이 줬다. 하지만 너는 그 기회들을 못 잡었으니 이제 너는 한국으로 다시 가라. 가면 너를 교회에서 이용할것이다." 라고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한국에 오기 한달 전부터 기도 하면서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구촌 처럼 큰 교회에서 근사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사진을 보고 우와 멋있다 데이빗!! 라는 말을 들으면 전도 한다는 것을 상상 했습니다. 한국에 왔을때 저는 살곳이 새 군대 있었습니다. 1) 저희 생명 샘 교회 다니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 2) 삼촌 집 3) 서울 이태원 근처에 있는 부자 친구의 집. 저는 7년 동안 혼자 살아와서 3번이 재일 좋았지만, 또 그런 인생을 살기 싫었습니다. 삼촌은 이제 옛날 처럼 저랑 롯대월드 이런데 같이 못가시고, 결혼을 하셔서, 숙모 눈치도 봐야해서, 1) 할머니 할아버지 집을 저는 갔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지구촌 교회에 가겠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저의 귀를 잡으시며 "잔 소리 말고 니는 내 교회 올거다"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할머니에게 "영어예배 있어요?" 라고 물어 봤습니다. 할머니는 "그래 니 할아버지 가끔 거기서 설교 하시는데 이번주 가 마직막이다" 라고 하셨다. "왜 하필 제가 처음로 가는주에 그만 하세요?" 할머니는 그냥 할아버지가 연새가 있으셔서 이제 못하신다 하셨습니다. 생명샘교회는 미국에서는 아주 큰 교회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예배가 적어도 100명 쯤 있을 거라고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영어예배 들어가는 순간 13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상상한 친구들에게 보여줄 근사한 무대와 영어예배가 아니라서 예배 도중에 이 교회는 안 와야지 하고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딱 제 마음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기구나. 하나님이 보내주실려는 곳이 여기구나" 예배 끝나자만 권장로님이 저에게 오셔서 왕 같이 환영해주셨습니다. 교회에서 꼴통으로 항상 보였지, 누가 제가 교회에 와서 좋아하는 것은 처음이 였습니다.그러자 어느날 장로님이 저보고 영어를 가르치라 그래서 저는 영어 가르치는 경험도 없는데 저는 그런거 할수 도 없습니다. 하지만 장로님이 "하지만 데이브가 영어를 여기서 재일 잘하니까 경험이 없어도 효과는 있습니다" 라는 말에 저는 머리를 글그면서 "네 알겠습니다..." 라고 자신 없게 대답을 했습니다. 동사 명사 형용사도 뭔지 몰랐는데요.. 그리면서 2개월후 제가 주보를 보고 있는데 제가 영어예배 부장으로 뽑혀있었습니다. 저는 권장로님 보고 "저기 장로님.. 저를 잘 몰르시느것 같은데... 저 미국에서 엄청 놀고.. 싸우고... 꼴통이 였습니다" 그러자 권장로님은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대이빗을 이용하실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거절하시면 안됩니다". 장로님의 말이 땃듯하게 제 마음에 들어와서 "네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장로님은 "데이빗.. 설교 도 부탁 드립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 설교요? 저보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 하시라는 말씀이세요?" 미국에서 많이 놀다가 지금 한국에 와서 영어예배 부장, 찬양팀, 설교, 그리고 영어를 가르쳐? 넌 지옥에 간다 동원아... 빨리 자퇴해라 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설교할때 잘 못 말하는것은 하나님이 재일 싫어하셔서 잘 못 말했다가 나중에 죽어서 큰일 날것 같아서 설교 준비할때도 땀 흘리며, 긴장 되며 했습니다.하지만 설교를 하면서 저는 하나니을 많이 알게 되었고, 사회 생활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옛날에 같이 미국에서 싸우고, 술 마시고 한 친구들이 저 한테 전화와서 "도대채 너 같은 애가 어떻게 변했냐.." 하나님 대해서 얘기 해달라는 친구는 한두명이 아닙니다. 설교도 하면서 하나님 대해서 배운것 처럼.. 몃달 동안 영어를 가르칠때 학생들도 배웠겠지만, 솔직히 제가 영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을 더 많이 배운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강의 할때 많이 떨렸고.. 그 약국 아줌마가 말씀 하신것 처럼 바보 같이 말을 많이 더듬었고, 어쩔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이 바쁘신 분들이 시간을 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영어를 배우실려고 여기 까지 오신게...내가 지금 교회에서 무슨 쌩쇼를 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영어 수업도 5-8명 밖에 안와서 썰렁 했습니다. 그리고 그 5-8명 중에서도 몇명 안오면 이것은 수업이 아니고 원투원 분휘기 였습니다. 그러자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못 오시는 분이 어느날 수업을 꼭 드르고 싶은데 오늘 못오니까 MP3로 녹음을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해드리면서 MP3로 만드는 재미를 발견했습니다. 생명샘교회 분들이 제 MP3를 들으시면서 너무 재미있다고 방송에 나가 보라 그래서 저는 자신감을 얻고, 인터넷 iTunes라는 방송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그 쪽에는 EBS, KBS, SBS, MBC, CNN, 큰 기업사들이 어제 방송 했던것들을 청취자들이 또 볼수 있게 올리는 되입니다. 저는 처음에 시작했을때 30명이 제 강의를 들어서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 다음주는 100.. 그 다음주는 1,000.. 100.. 50.. 25.. 10... 5.. 그러다가 오늘까지 합해서 80국 나라에서 150만명이 제 강의를 듣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많은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너무 좋은 일들이라서 자랑으로 될까봐 나누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영어예배는 13명이 아니라 45명 까지 부흥해서 너무나 감동이 입니다. 저 같이 옛날 처럼 술 많이 마시고, 놀고, 싸우고 있는 아이들도 이제 상담해주며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주 화요일 날 하나님이 군대로 보내주십니다. 나이가 들어서 가지만 저는 열심히 나를 위해 지키고 군대 안에 어린 아이들에게 안 시켜도 "내가 하겠습니다" 하면서 겸손한 크리탄 모습을 보여주면서 군대 안에서도 하나님의 씨를 뿌리고 전도를 하고 오겠습니다. 다시 생명샘교회로 올때는 더욱도 은혜스러운 간증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