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나눔

믿음과 인생관

작성자 전복례 날짜2003.11.13 조회수3426
작성일 : 2003/06/25 22:23



`하늘의 운명을 너에게 맡겼으니` 하는 이 말씀은 이번 로마서 말씀 수련회 기간 중 목사님의 말씀이시다 . 거기에 전후로 연결된 많은 말씀들은 작은 빗소리의 은혜였다면 이 말씀만큼은 매우 크고도 위력적으 로 들려왔다.

나는 이 운명이라는 말은 세상 속에서나 거기에 속한 자들이 쓰는 말로 그들이 무슨 일을 하다가 잘 되어 지지 않을 때에 그저 막연히 그것에 맡기거나 아니면 그것을 탓하면서 그 속에서 빠져 나오
려는 하나의 돌파구 쯤으로 생각을 했었다. 또한 다른 뜻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 가 수명을 다 하였을 때에 마지막 표현으로 쓰는 말로 들어왔었다.

그럴 때엔 나는 그 분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한동안 슬픔에 잠겨 언젠가 다가올 내 인생의 끝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곤 하는 게 나의 운명론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 운명이라는 말이 신앙 안에서 말씀 중 에 더구나 하늘에 붙여지고 또 `그 운명을 네게 맡겼으니` 하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참으로 이 말이 어 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이 말씀의 전후를 명확히 듣지 못한 게 많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 높은 하늘의 운명을 이 작은 내가 믿음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즉, 어떻게 살아야 위 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스러운 운명이 되는 것인지.....하고 깊은 고뇌에 차 있을 때에 마침 전도사님으로부 터 전화를 받았다.
로마서를 배우면서 느낀 바를 제출하라는 교회 방침을 듣고는 `그냥 지나치고 싶은데요` 하며 거절을 하 였다. 그런데 그 순간 불순종했던 `요나`가 떠올라 회개하는 차원에서 순종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렇게 펜 을 들었다.

그럼 이렇게 순종하는 것도 하늘의 운명에 순종하는 것일까? 흔히 쓰는 말이 아닌 듯 싶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동안에 가졌던 내 나름대로의 인생관에 있어서 기준이나 가치가 예순의 중심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단 한 사람과 의 만남에 있어서도 확실한 신앙관 안에서 멧세지를 전하겠다.
`하늘의 운명을 지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 마른 영혼에 단비가 될 것이다.

그동안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하여 그런 자에게 얼마나 무관심 했던가? 이젠 그런 자에게 하늘의 운명을 걸어 결실을 맺는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사업이나 사람들 의 생사에 관해서 하늘의 운명을 대입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일 많이 보고 만나는 게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이 시간 조용히 예수님을 생각해 볼진데,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 그들에게 `하늘의 운명`을 걸어 볼만한게 아닐까 ? 그러나 이에 앞서 내 자신에게 먼저....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왜! 그 말씀이 사명감처럼 밀려오는 지 내 가슴에 잔잔한 물결이 이른다. 다시 말해 그 말씀은 내가 처음 예 수를 만났을 때처럼 설레이는지...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주님! 이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