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5/11 11:42
장근주 생의 간증문
나는 여러번 생의 간증문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것이 싫었고 더구나 글로 쓰는 것은 더더욱 괴로운 일인것같아 한번도 순종하지 않았다.
이제는 순종하는 것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순종하려 한다.
나는 2남2녀의 막내이다. 우리 아버지는 남에게는 너무나 호인이셨지만 가정에서는 대단히무서웠고 약 주을 드시면 밤새 엄마를 괴롭히셨다. 혈기가 한번 나면 온집안이 발칵 뒤집혔고 결국 우리는 통행금지 시간이 지났서도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 자리를 피해야지 그곳에 있다가는 맞아 죽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자다가도 낌새가 이상하면 일어나 옷을 튼튼히 입고 가방을 챙겨가지고 도망 나와야 하는 상황이되면 가방을 들고 도망쳤다. 이렇게 난리가 나면 기본이 1주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형제들은 자립심이 강하다. 살얼음을 걷고 사는 불안한 가정이였기에 가족끼리 오순도순 이야기 를 나눈다거나 상의한다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철야 예배 때 서로 사랑 을 나누라고 하면 나는 너무나 어색하다.
엄마하고도 다른집 딸처럼 살갑게 못한다. 엄마는 가끔 너처럼 쌀쌀맞은 애는 없다고 하소연 하신다. 마 음은 그것이 아닌데 표현이 잘 안되고 또한 웬만해서 놀라움과 흥분이 없다.
너무나 큰 일들이 많은 가운데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애기할 때 나는 그래도 우리 아버지보다는 낫다라고 속으로 외친 다. 동네에서 안가본 집 없이 잠자리 신세를 졌다. 나와 같은 학년 남자 아이에 집에 가서 아침을 맞이하면 나는 너무나 창피했고, 모처럼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온집안은 아수라장이고 장독대의 항아리가 산산 이 조각나 간장이 줄줄흐르고, 통행금지가 지나 쫓겨나서 처마 밑에서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릴 때 방 법아저씨들이 지나가면서 꼬치꼬치 케물을 때 무너져 내리는 그 무엇을? 그나마 우리들의 방패였던 작 은오빠가 군대에 가고 엄마의 머리채를 놓치 않으시는 작은 체구의 아버지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 지 새삼 깨달으며 망막해 하던일, 사흘이 멀다하고 눈두덩이가 시퍼래가지고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장 사를 나가시던 어머니의 모습, 우리에게 커다란 버틴목이 되어주셨던 어머니가 어느날 드디어 언니와 나를 두고 한달정도 나가셨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았던 기억, 초등학교 3학년까지 소풍때마다 난리 가 나서 한번도 가지못했을 때 오빠가 너무나 안됐는지 그아침에 나를 데리고 나가 가방가득 빵과 음료 수를 사서 소풍을 보내 주었다. 얼마나 무거웠는지 오빠의 울분이 담긴 표현이였던 것 같다. 그런데 김밥 이 너무나 먹고 싶었는데 아는 엄마들이 소풍에 함께 오셨는데 어느 누구도 먹어보란 말이 없었던 기억 , 전에는 몆날 며칠을 밤을 새고도 못다할 것같은 많은 일들도 세월이 약이라고 많이 희석되어 아련한 추억 으로 있지만 지금도 저 깊숙한 곳에서 쓰려오는 아품이 있다. 그나마 아버지에게 고맙고 감사한 것은 우 리가족에게 남에게는 떳떳함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시절은 못 사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남을 속여 먹 는 사람도 많았고, 추한 사람이 많앗다. 내 아버지는 굉장이 엄격했고 남에게는 절대로 해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 우리집은 교회와 붙은 집이였다. 나는 혼자서 열심히 다녔다. 유독히 가난한 동네 교회였기에 어 린시절 교회는 유일한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교회에 가면 목사님 설교 시간에는 고개도 한번 돌리지 않는 아이였다. 완고하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유두리가 별로 없다. 성탄절이 오 면 연극도 하고 가족 찬양을 한다던가 하면 혼자인 나는 집사님들 가족이 찬양을 하면 참 부러웠다. 누구 누구 집사 아들이 잘하더라 너 누구누구 집사 딸이지 하며 알아주는 말들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 래서 지금도 학생부에 혼자 나오는 아이들이 나는 더 마음이 쓰인다. 초등부에서 우수상을 받고 중등부 에 올라갔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는 아무 말씀 안 하시던 아버지가 중학교에 가자 교회를 못 가게 하셨다 . 너무나 무서운 아버지의 명령이였다. 나는 몰래 교회를 나가다가 어느 수요일 저녘예배 중간에 불려 나 오고 말았다. 아버지는 내가 우등상으로 받았던 신구약 성경책과 찬송가를 찢고 불로 태우시고 나는 엄 청 혼났다. 나는 울며 타다 남은 성경책을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놓고 그 뒤로 교회에 가지 못했다.
우리 집은 교회와 붙은 집이였기에 주일날이나 토요일 학생예배 후 밖에서 떠드는 소리들이 다들렸다 . 참 애타는 순간들이 많았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3학년 연합고사가 끝나고 긴 겨울방학 때부터 나는 아버 지 몰래 다시 교회에 가끔씩 가게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7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 가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집안을 온통 뒤집어 놓 고 가셨다. 나도 한창 반항기 때여서 그랬는지 처음으로 그날 저녘 아버지께 대들고 뛰쳐나와 동네를 방 황하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절박한 심정으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 루는데 나는 울음이 나지 않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옷을 갈아 입히신다고 가족들을 다 불러 들어 갔다. 그때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그립거나 불쌍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인생이 불쌍했다. 그 날리 를 치시던 그분은 아무 힘도 없이 구부러진 팔을 바로 놓으면 다시 돌아가고 저렇게 가실 것 그렇게 힘들 게 하시다니 살아 있는 동안 아옹다옹하지 말고 살아야지 좋은 말만 해도 못다할 생인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께서는 너는 딸이니까 교회 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가라고 하셨다
그 때부터 나는 자유롭게 교회에 갈 수 있었다. 가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아버지를 데려 가셨나 하고 생각 했다.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악이 극에 달해 온집안을 삼키려 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도 장 손이면서도 작은 할머니가 아들을 먼저 낳아서 아버지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라났던 어린시절 의 울분이 가득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이해를 한다.
나는 혼자 교회를 다녔기에 주일날 예배는 꼭 드렸지만 집에서 기도를 한다던가 말씀을 보는 것이 일상 적이지 못했다. 이런 내게 위기가 왔다. 4년쯤 사귀던 남자와 굉장히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작은 일이 라도 다 알려 했고 조금이라도 거짓된 것을 용납을 못했다. 그런데 이남자는 마음이 유하고 작은일에 곤 란한 상황이 되면 슬쩍 넘겨 버린다. 끝까지 완벽하게 숨기지도 못하면서, 또하나 나를 알면서부터 교회 에 나온지라 그냥그냥 예배만 겨우드리고 있었으며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한터라 꼭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 그당시 나는 영락교회 중등부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교사들과 이야기를 해보 면 신앙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었는데, 이남자는 이부분에서 전혀 심각성이 없었다. 처음 만날때는 신 앙에 대해서 전혀 문제시 하지 않았던 내가 성경에 축복받는 계보 줄기가 눈에 들어 왔다. 하나님이 쓰셨 던 다윗의 계보, 예수님의 뿌리가 보였고 그렇다면 신앙도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권 에서 벗어 날것 같았다. 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고 나는 너무나 신경이 예민해져서 물만 마셔도 토해버 리게 되었다.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해보아도 결국은 내마음이 전달이 되지 않았고 돌아오는길에는 상 처만 남게 되었다. 나는 두가지 선택의 길에 서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괴로운 것을 세상적으로 풀어보 고도 싶어서 방황을 해볼까도 했고,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나 갈등하면서 내가 선택한 것 은 후자 였다. 왜냐하면 내가 이 남자를 교회로 인도 했는데 이대로 헤어진다면 이남자는 다시 교회 근처 도 안 갈 것 같았다. 그래서 집 앞 교회에 새벽예배도 나가고 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교회 지하 기도실 에 들러 기도한다고 앉아 있으면 워냑 기도도 안해본 나는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그리 고 찬송가349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하념없이 부르 다 돌아 오곤 했다. 이때가 86년 12월경 새해부터 매일 성경읽기를 한다고 소책자를 준비했는데 그 매일의 양 식과 새벽예배를 통해 내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셔서 나를 위로해 주셨다. 주말에는 영락 기도원도 혼자 올라가 그냥 앉아 있다 내려 오곤했다.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서서히 이끌고 계셨나 보다.
87년 봄 고등학교 때 우리 교회 교육 전도사님이셨던 박승호목사님께 나의 초등부 시절 선생님이셨던 부 부가 영성훈련을 받으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연찮게 함께 교사로 봉사하는 어떤분께 이 이야기를 했다 . 그런데 이 분이 ‘장선생 우리도 끼워달라면 안될까?’ 하신다.
나는 펄쩍 뛰며 저는 못해요. 그분들은 큰 교회 구역장, 고등부 교사등등 굉장한 분들이세요 제가 선생님 만 말씀드려 드릴게요. 하고 그분들게 목사님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드렸다. 다음날 박목사님이 전화 를 하셨다. 그 선생님에 대해 물으시고 나서 ‘근주야 너는 할생각 없니?’ 하신다. 제가 어떻게 할수 있겠 어요 저희 선생님이셨던 분들이고 이분도 야간에 신학교를 다니시는 대단한 분이신데 저처럼 기도도 말씀도 제대로 하지 않는 난데 이런 생각과 함께 나를 끼워주신다는 목사님의 말씀은 너무나 감사했다 . 목사님이 그냥 성실히 숙제만 해오면 된단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 그 모임에 가게 되었다.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 하던 나에게 아주 기초부터 디모데 과정에서 복음이 무엇이며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너무나 꿀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나는 화요일날 그모임에 갔다 오면 엄마와 올케 언니를 붙들고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알게 되니 입이 떨어졌다.
우리엄마가 언니를 시집보내고 와서 그렇게 많이 우실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내가 막내인데 나를 시집 보내시면 어떻켓나 걱정이 되면서 마음으로 결심한 것이 있었다. 내가 시집 가기전에 꼭 예수를 친구 삼 아 들여야지 했다. 영성훈련 2개월만인 5월에 엄마를 전도했다. 그뒤로는 나중된자가 먼저 된다고 나보다 낫게 신앙 생활을 하셨다.
부활절이오면 절기 공부를 시키셨다. 이 때는 open공부였다. 누구든지 받아 주셨다.
나는 기대도 별로 안하고 화해한지 얼마 안된 이남자에게 내가 성경공부하는데 가지 않겠냐고 제의 했 다. 그런데 순순이 가겠단다. 나는 너무나 꿈만 같았다. 그때가 부활절 마지막 강의 ‘다시 오실 그리스도 ’라는 제목으로 종말에 대해 말씀 해 주셨을 때다.
자기가 생각했던 딱딱한 성경공부가 아니였고 또 그 집사님부부가 집에서 굉장히 편안하게 대해 주셔 서 근방 적응하고 그해 여름 에베소서 수련회 까지 참석하게 되었다.
그래서 88년 5월 결혼을 할때는 그간의 고민이 확신으로 바뀌어서 편한하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갈등에서 내가 세상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사이클을 맞춘 것이 하나님께 서 나를 향하신 일들을 하실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처녀때 나의 상사이신 집사님께서 여러군데 선교 헌금을 보내셨고 신문지상에 어려운 일이 생기 면 무명으로 성금도 늘 내시는 일을 내가 심부름하게 되었다. 나는 그분이 너무나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셨다. 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하시며 우리의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 하신다고 믿는다. 나의 그때의 갈망을 조금씩 이루시게 하신다.
나는 물질을 잘 쓰고 싶다. 지혜롭게 잘 관리하고 싶다. 쓸 곳과 아닌 곳의 구분을 잘 하기 원한다. 나는 물질 의 양에 따라 소비를 조절하지 않는다. 써야 될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해 많이 있다고 좀 더 먹고 좀 더 사려고 안한다. 습관적으로 아주 상품보다 한단계 낮은 물건을 고르게 된다. 그래서 어쩔때는 손해 볼 때도 있고 내자신이 답답 할때도 있다. 남이 쓰는 것 보고 상처 받을 때도 있다. 사람들이 알면 웃겠지만 나 는 퍼마하면 그다음 퍼머할때까지 미용실에 못간다. 컷트비가 아깝고 유행하는 염색비가 너무 아까와 못한다.
그래서 지혜를 구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순종하길 원하며 나의 잘못된 생각과 습관을 고치길 원 한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나를 잔잔한 가운데 받으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