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신 34:7-12)
박덕자 지파 이경화셀 이경화
*에펠은 사람들의 비난과 반대를 물리치고 근대 건축에 철강을 도입한 에펠탑을 세워서 파리를 기념하는 상징물로 자리 잡게
했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건축물을 남겼다. 한 사람의 꿈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우리 삶의 의미는 몇 년을 살았느냐가 아닌 무엇을 남겼느냐가 더 중요하다.
3,500년 전에 살았던 모세의 삶
부르심이 분명했고 목표가 분명했던 사람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
그가 추구한 가치는 일반인과는 다른 것이었다.
1.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창조주로 말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탐욕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했다. 반면 모세는 ‘반석이시고 완전하시며 진실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우리의 언어가 중요하다. 인생은 사건이 아니고 해석이다.
모세는 처음 40년은 궁궐생활, 그 이후 40년은 광야생활, 마지막 40년은 광야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다.
요셉은 종살이, 감옥살이로 억울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냥 따라가다가 뚜껑을 열어보니 총리가 되었다. 우리 삶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각본 속에서 움직이므로 오직 신뢰하고 따라가면 된다. 눈, 관점, view point가 중요하다.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말고 보여지는 대로 보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본다면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할 수 있다.
2. 자녀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했다.
나의 자녀가 어떤 복을 받기를 원하는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말씀 맡은 자로 세우라.
목자, 제사장, 부모에게는 축복권이 있다. 부모는 떠날 때에 반드시 자녀를 축복해야 한다. 축복이 흘러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야곱’은 ‘갈취하는 자, 축복을 가로챈 자’ 이었으나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므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면서 ‘축복하는 자’로
장자권을 얻었다. 기도로 왕권, 제사장권, 2배의 축복을 받는 자가 되었다. 모든 민족과 개인의 흥망성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결론은 신뢰의 문제다. 인생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3. 후계자를 세워 스피릿을 전수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구속사가 면면히 흘러가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썬십과 킹십의 조상으로 부르셨다. 나는 누구에게 사명을
전수하고 있는가? 그를 어떻게 훈련시키고 준비시키고 있는가? 모세가 여호수아를 길러냈던 것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구속사의 바톤을
다음세대로 이어줘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다목연, 말목청, 말목고, 대안학교, 3인턴 4세대.,, 등 다음세대를 세우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소감>
요즘 문득, 제 나이를 세어보니 얼마 있으면 60이 가깝다는 것에 화들짝 놀라서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금까지
잘 산 것이었을까?’하는 질문과 의문들 속에서 지나온 세월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지금까지 인도하셨고,
언제나 신실하셨으며,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표현할 때 ①하나님 같은 이가 없다. ②이스라엘의 거처가 되신다. ③‘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최근에
하나님이 저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신 일을 간증해볼까 합니다.
용인시에서 10년 동안 근무하면 다른 시로 옮겨야 하는 규정에 따라 올해 만기가 되어 수원시, 성남시, 화성시로 내신을 냈습니다. 3개의
시를 합하면 어마어마하게 넓은 지역이므로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발령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내건 조건은 교회에서
가깝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올해부터 생활기록부가 결과가 아닌 과정 중심으로 바뀌어서, 일 년 동안
모아놓은 자료를 참고로 하며 방학동안 두문불출하고 생기부를 쓰느라 폐인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과로사로 생을
마감할 것 같아서 생기부의 부담이 덜한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생기부에 파묻혀 있던 2월 초, 경기도 교육청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3군데 내신을 낸 곳에 자리가 없으니 의정부시, 고양시, 여주・
이천시, 시흥시, 평택시 중에 한 곳을 고르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점수가 높아서 선택권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동두천이나
의정부로 꽂힌다는 것이었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고 순간 망연자실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고양시로 간다면
엄마 집에서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으므로 지금보다 더 편하게 살 수 있고, 평택 근처에 방을 얻는다면 출퇴근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렇지만 둘 다 주일 이외에는 교회에 올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생각하지 않으면 운신의 폭이 넓은데, 교회를 택하려니 너무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고양시로 가면 교회에 오기가 더 힘들 것 같아서 일단 평택시로 가겠다고 하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가까운 학교는
40km, 먼 학교는 52km 거리였습니다. 市만 지정할 수 있을 뿐, 학교는 지정할 수 없기때문에 어디로 발령이 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학교라 최소한 5년은 다녀야 하기에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을까” 싶어서 눈물만 났습니다. 2시간쯤 앉아서 울다가 그날
외운 학가다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긍휼이 풍성하신 분, 우리를 크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사랑’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왔다면 감동이 덜 되었을 것입니다
. ‘긍휼’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와서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것도 긍휼이 풍성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의 제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며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계시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평택으로 가라고 하시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감사의 기도를 하고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다음날 일찍 눈이 떠져서 조용한 가운데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제 나이쯤 되면 모두들 명퇴를 하거나 건강이 안 좋아서 학교를 그만두거나 합니다.
건강해서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평택까지 타고 갈 자동차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오고 가는 차안에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하리라 마음먹으니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개학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전화가 왔습니다. 장학사님의 말이 “선생님, 4지망으로 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1지망으로 해드리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연유인지 물어보니 조정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제는 지옥이었는데 하루 사이에 천국으로 바뀐 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만약 고양시로 간다고 했다면 이런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때문에 평택까지 출퇴근하겠다고 결정한 마음을 보셨을까요?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수원시로 해주시지 않았을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이 개입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이렇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만에 수원에 있는 정보과학고등학교로
발령이 났습니다. 생기부의 고통을 덜어주시려고 인문계가 아닌 특성화고로 발령을 내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밀한 부분까지 알아서 챙겨주시며
크신 긍휼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0년 동안 근무했던 용인을 뒤로하고 짐을 정리하며 들통을 챙겨 드는 저를 물끄러미 보고 계시던 부장님이 한 말씀 하십니다. “그 학교 가서도
아이들한테 계란 삶아 주려고?” “네”라고 대답하고 나서 양은들통을 바라보니 오랫동안 사용해서 볼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들통 하나면
아이들에게 라면도 끓여주고 계란도 삶아주고 고구마나 옥수수도 쪄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먹는 아이들의 표정이 얼마나 행복한지...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교직에 들어오게 하셨으니 주님께 진 빚이 많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들통같이 못나고 미련하고 어리숙한 저를 하나님이 애지중지 하시며
돌봐주셨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으니 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교회에서 배운 스피릿을 전수해야 되겠지요.
교회에서는 맡겨진 셀원들을 일대일로 양육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려고 합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훌륭한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눈물의 기도와
양육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생기부를 마감한 다음날 학교 발표가 있고나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기도 24365’에서 2명의 양을
맡아달라는 전화였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노는 꼴을 못 보십니다. 이제 막 숨을 돌리려고 하는데 일을 맡기십니다. 그동안 양을 붙여주지 않아서 4개월쯤
기도를 쉬고 있었는데, 저 같은 사람에게 양을 맡기시며 열방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걸 보니 이 세상에 어지간히도 사람이 없나보다 싶어서 마음이
짠~해집니다.
“나는 무엇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말씀과 일대일이 될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섬길 수 있는 옵션까지 주셨으니 영역이 넓은 셈이지요.
예전에 ‘기도 24365’를 시작할 때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8).”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 이방나라까지 책임져달라는 하나님의 소원을 마음을 새기고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약속을 성취하셨듯이
저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참 좋았다.”, “참 행복했다.”라고 고백했던 모세처럼 똑같은 고백을 하며 생을 마쳤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