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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전능자의 살 (욥6:1-13)

작성자 설진용 날짜2006.08.12 조회수3787
 

전능자의 살 (욥6:1-13)


06.08.06


1. 본문 주요 내용


죄를 고백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엘리바스의 말에 대하여 욥은 자신을 원통하다고 한다. 전능자의 화살이 자신에게 박혀 그 독으로 인해 고통스러운데, 거기에 친구들로부터 정죄함을 당하고 있는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므로 그분의 섭리에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도 절망 중 말씀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심에 기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2. 묵상하기


어려움과 고난이 올 때는 일단 죄를 철저히 회개한 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회개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 두 가지를 다 해야 하는 것이다. 깊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죄하는 말을 하거나 수군거리며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경우는 없었는가? 새로이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힘들어 하거나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찾아가 위로하고 있는가? 매 순간순간 참으로 주님의 뜻 안에 거하며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1) New Thought; 우리에게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전능자의 살


2) Sins; 포용적이고 너그러운 마음을 갖지 못하는 어리석음


3) Promise;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운동할 때 힘이 되고 방향키가 된다.


4) Example;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따른 다윗


5) Command; 말씀에 집중하라




3. 소감


욥은 자신의 분한(憤恨)이 바다 모래보다 무겁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환경에 대하여 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분하다는 것일까? 욥의 친구들은 욥이 고통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하고 위로하기 위해(욥2:11) 욥을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위로하기보다는 욥을 질책하고 있다. 욥이 죄를 짓고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재앙이 온 것이라고 말한다.


고통이 심하여 괴로운 터에 잘못으로 인해 고난을 당한다며 질책하는 말을 듣다보니, 그럴듯한 말로 정죄하는 친구의 말로 인한 시달림과 극심한 괴로움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감정의 뒤섞임 속에서 욥은 더 큰 고통과 혼란 속에 빠져 외치고 있다.


우리는 말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말을 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도 많다. 키가 작아 콤플렉스에 빠져있는 자매에게 ‘다 예쁜데 키만 조금 크면 좋을 턴데’ 라고 하든가 코가 낮아 고민하는 사람에게 ‘코를 조금 높여봐’ 하고 말하는 수가 있다. 상대에게 위로를 준다고 생각하지만 단점을 지적받았다는 생각에 더 힘들어할 수 있다.


초신자이거나 등록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아는 사람 없고 적응이 잘 안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어깨에 멍에를 메우는 경우가 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나 교회를 옮겨와 아직 적응이 안 된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자칫 내 기준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대함으로써 그들을 힘들게 할 때가 있다.


교회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일이다. 교회와 선교단체를 번갈아가며 나가고 있었다. 교회 청년부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갑자기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뒤에는 청년부 지도 목사님도 계셨다. 반응이 약하자 다시 ‘할렐루야’를 외쳐 ‘아멘’을 유도하고 내 소개를 했다. 선교회의 ㉨모 간사가 한 모습 그대로를 따라서 했는데, 뭔가 특이한 그 모습의 내 눈 속에 강하게 기억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참 돌아간 뒤 어떤 청년이 그의 소개를 할 때, 나더러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 같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자 ‘골리앗’이라고 한다. 나는 골리앗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를 몰랐다. 주위 반응은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선교회의 한 형제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분명치 않은 말로 얼버무리는 것으로 보아 좋은 말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의 무례함을 지적하는 말이었고, 꽤 좋지 않은 말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른 큰 이유가 있었지만 그 영향도 있었는지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그 교회를 그만 나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까지 흘리셨다.(요11:32-35) 우리는 사물과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곤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라고 하시지만, 부활 때나 되어야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믿는 마리아가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또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요11:37) 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보며 주님은 눈물을 흘리며 통분해 하신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나 새로이 등록한 교인들의 경우 교회 질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많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 처음 교회에 와서 목사님 설교가 좋다고만 생각하며 지내던 때, 김선태 집사님의 따뜻하며 친절한 인사에 서먹하던 우리 부부의 마음이 녹아들기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부지중 오살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청년이 나를 못된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말로 인하여 실족하여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18:7)고 말씀하신다.


언제던가 우리 교회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떤 분이 마이크를 잡고 크게 말한 적이 있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구인지 다들 잘 모르는 사람인데 설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처음 온 사람이라고 해서 조용히만 지내야 하는 건 아니야’, ‘나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꽤 폼 잡았을 사람인데’ 하는 생각들이 내 속에 뒤섞여 물결을 이루며 일렁였다.


우리들에게는 많은 생각(生覺)들이 여러 가지 물결을 일으켜 마음의 바다를 고요하게 머물러 있게 두지를 못한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 마음의 바다가 평온한 상태였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바람과 파도를 보고 그 마음 속 바다가 출렁이자 곧 빠져 들어갔다. 눈으로 바라보는 바다의 파도로 빠져 들어간 것이 아니고 마음 속 바다의 물결이 흔들리자 빠져들어 간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들을 칼질한다. 다른 사람의 장점보다 단점을 보고 지적하거나 수군거리는 것에 익숙한 우리의 모습이다. 나아가 자신이, 자기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고,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들을 정죄하듯 말한다. 다른 사람과 다른 교회들을 이른바 까면서 내가 또는 우리 교회가 잘 하고 있다고 한다. 자기 교회 사람들이나 담당 목회자에 대해서도 예리한 칼날을 서슴없이 휘두른다.


‘교회가, 설교가 말씀 중심이어야지 다른 것이 더 중요시되면 안 된다’ 분명 맞는 이런 말들이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도구가 된다. 성령의 검이 죽이는 비수로 사용된다. 나는 옳고 다른 이들은 그르다는 식이다. 칼로 자르고 찌르면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의 자극에 젖어 흥분되는 것을 신앙에서 오는 기분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분명한 신앙의 원칙은 지켜져 나가야 한다. 하지만 내가 가는 방향만이 반드시 옳은 것이고 그 외의 방법은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더 문제인 것이다. 너그럽고 포용적인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 주님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말씀하신다.(잠10:12) 까고 지적하고 비난하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고 한다.


전능자의 살이 몸에 박힌 까닭은 무엇인가? 먼저 우리는 철저히 회개하여야 한다. 같은 죄를 반복하여 짓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다. 매일같이 같은 죄를 회개하고 또 짓고 또 회개하는 일이 언제까지나 가면 해결될 수 있을까?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있는 고뇌에 찬 세상을 어떻게 하면 달리 살아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답답한 이 상태,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의 도를 지키는 것일까?


그 답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해왔다.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달아 보려 했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나를 잊어버리면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인격 수양을 위해 어른들이 끊임없이 아이들을 훈계하고 가르쳐 성인(聖人)이 되게 하면 해결되리라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고, 이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삶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기독교인 중에도 이런 류의 노력을 하는 사람이 있다. ‘죄를 짓고 또 짓고 하는 곤고한 생활에서 벗어나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반복되는 죄의식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다가 이단으로 간다. 뭔가 좀 특별히 신령한 사람을 만나서 배우면 평범하고 따분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찾다가 잘못된 길로 빠져 생명을 잃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해서 현실에서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내 죄를 다 제거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우리에게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매일매일 회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축복이요 은혜이다. 매일매일 지은 죄를 회개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특권인 것이다.


신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는데 그것이 주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어느 순간에 보면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볼 때도 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하셨다. 전능자의 살이 그래서 필요하다. 그래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필요한 것이다.


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기 위해 전능자의 살이 필요하다. 지은 죄를 돌이켜 회개하게 해주시는 주님의 막대기가 필요하다. 우리를 성장케 하기 위해 고난 가운데 인도하시는 주님의 지팡이 역시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내 죄를 회개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려는 막대기가 있기에, 그리고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주님의 큰 뜻을 위해 나를 이끌어줄 지팡이가 있기에 우리는 담대히 나아가며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결단 및 적용


욥은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면서도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지킬 수 있기에, 자신이 곧 죽을지라도 오히려 위로를 받고 고통 가운데도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진리를 따르며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오직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마음과 생각, 행실을 점검하고 바로잡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의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롬14:8) 이라고 했다. 내가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 살진대 내가 기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의 위로와 힘은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할 때 진리 안에 거하며, 내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 주시는 말씀에 집중하자. 눈빛이 종이를 뚫을 만큼 집중력을 가지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삶에 적용하자. 그 말씀이 내 속에 살아 운동력을 나타내도록 주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자.


5. 기도


주님!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진리를 외치며 저마다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판단하며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다면서 힘들게 할 때가 있고, 위로를 한다면서 아픈 마음을 들쑤셔놓기도 합니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에 의지하여 어지러운 세상에서 진리의 등불을 붙잡고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오로지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이 내 마음에서, 내 삶에서, 내 직장에서 힘이 되어 나타나도록 주신 말씀에 집중하게 하시옵소서.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이 세상에서 주님 뜻대로 살아가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