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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구분하시는 하나님 [펌글]

작성자 묵상 날짜2004.11.29 조회수3812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입니다. 아모스선지자에 의하면 이들은 매우 잔인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왕하16장에 보면 아람왕 르신이 이스라엘왕 베가와 함께 남유다를 침략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방을 심판하실 때에는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아무 까닭없이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다메섹성은 무너져 형태를 알아 볼 수없고, 아로엘의 성읍들은 황무해져서 양을 치는 곳이 됩니다.
사람들은 다 죽고, 잡혀가고, 도망가고 해서 남은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양들이 누워 있는 것을 자주 보니깐 서로 놀라지도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악한 일을 위해 함께 동맹했던 에브라임의 요새, 다메섹 나라,
아람의 남은 백성들이 함께 멸절을 당합니다. 정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이 당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형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기원전 6-7세기라고 생각하면 우리나라로 치면 고조선이 있을랑 말랑할 때였을 겁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의 요새라고 한 것을 보니, 그 일에 에브라임지파가 앞장섰을 것 같습니다.
다메섹이 아람에서 가장 리더격인 곳이기에, 이곳의 멸망을 먼저 언급하지 않았나 봅니다.
하나님께서 까닭없이 심판하지 않습니다. 도매금으로 나라들을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을 구분하시고, 아람과 다메섹을 구분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현재는 내 인생의 결론'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저는 한 동안 이 말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부분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말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정확하신 하나님을 깨닫는 순간, 이 말이 확 이해가 됩니다.

일단 하나님은 정확하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정확하게 심판하셨다면 '나의 현재'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보다 나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고난이 있지만, 속썩이는 가족, 쪼들리는 물질, 병든 몸... 이것이 내 삶의 결론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방을 심판하듯 정확하게만 하셨다면 '지금의 내 현재'가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것을 깨닫기조차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방과 유다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의 결론이라고 깨닫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나쁜 쪽에서 '내 인생의 결론이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4절부터는 야곱(이스라엘)의 멸망과 지극히 적은 남은 자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영광이 쇠하고, 살찐 몸이 야위어 진다고 합니다.
손으로 이삭을 벤 것같고 르바임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다는 것은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손으로 일일이 하나 하나 다 주운 것처럼 남긴 것이 없이 심판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오히려 주울 것이 남겠다고 하십니다.
감람나무를 흔들어 모든 열매를 떨어지게 해도, 꼭대기에 두세개가 남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심판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극히 소수의 남은 자는 있으리라는 의미입니다.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너댓개 남은 것은 남은 것일까요? 다떨어진 것일까요?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를 계속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실 때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그리고 다른 이방나라들을 심판하실 때가 조금씩 다른 것을 발견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유다의 경우는 오히려 '남은 자'를 심판보다 더 강조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 남겨두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에 대해선 긍휼없는 심판을 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7절에 보면 '그 날'에서야 사람들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은 다른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앗수르를 바라보고, 바알과 아세라를 의지했었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견고한 성읍들이 잡초가 우거진 황폐한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내 인생이 이토록 황무한 잡초같이 되어 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좋은 직장을 다녀도 마음은 황무합니다. 좋은 집에 살아도 불행의 잡초가 집안가득합니다.
왜 입니까?

10절에 보니,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예 잊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 이방인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구원은 모릅니다.
'자기' 구원의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멀어진 상태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형식적으로 그 이름을 부를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심판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심판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먼 미래의 심판이 아니라, 잊어서는 안될 것들을 잊어 버리는 순간 심판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망각'이라는 은혜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만약 이 은혜가 아니면 저는 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망각해 버려야 할 것들은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망각한 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은 내 능력의 반석이십니다. 내 모든 힘과 의지와 소망의 근원이 반석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잃어버리고서야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바로 이것이 심판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12절에는 앗수르에 대한 심판이 다시 한번 간단히 소개됩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아무리 성난 파도처럼 밀려와도, 수많은 민족들을 충돌하는 큰 해일같은
세력이라도 주께서 꾸짖으시면 겨가 바람에 흩어짐 같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에 그들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를 노략한 자의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