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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1:1-8 “언약의 징표들”
1. 과부가 드린 (헌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3절
예수님은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어떤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렙돈은 유대의 가장 작은 화폐입니다. 데나리온(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1/128입니다. 이 렙돈이 얼마나 작은 단위였던지 당시 성전 규정상 한 렙돈은 헌금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시고 더욱이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도록 두시고, 왜 또 그것을 귀하다고 할까요? 긍휼히 많으신 예수님의 성품대로라면 당장 하루 먹을 것이 없는 그 과부를 향해 연보궤에 넣지 말라고 하셔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생활비 전부를 넣는 그 과부를 향해 귀하다고 말씀하시냐는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받으실 때 얼마나 안타깝게 여기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는 표이니까요. 과부의 두 렙돈은 “나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이며,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은 나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라는 감사의 표로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헌금의 힘이고, 위력이고, 가치입니다. 헌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나라를 갈 사람으로 이 땅에서의 사는 자의 감사의 표입니다. 포도원 농부들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이 3~4번씩이나 종들을 보내면서 그 세를 받으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은 그 세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토록 보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관심은 재림하는 날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되찾아 주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고아와 과부와 내 어린양들, 나를 사랑하는 저들을 너희들이 돌봐달라는 것입니다. “전 삶을 하나님에게 의탁하는 사람들” 그런 나의 어린 양들을 너희들이 보살펴 주고, 섬겨 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돕고 성도가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2. (성전)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5-6절
어떤 사람이 성전 자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의 의미는 믿음의 중심이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이 성전은 헤롯 대왕이 재건한 것으로, 입구부터 흰 대리석으로 세웠으며, 문들은 황금색으로 만들었고, 금 세공품들과 거대한 동상들로 만들어 얼마나 장엄했던지 자랑거리와 볼 거리로 여겼다고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곳, 죄 문제를 해결하는 곳,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에 빠져 버렸습니다. 본래 성전의 의미는 사라지고 우상 숭배하듯이 장식된 보화들이 많아지면서 성전이 형식주의와 위선들로 가득 차 버린 것입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고 하신 이 말씀은 성전은 건물로서의 자랑 거리가 아니라, 성전의 기능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예배와 기도, 찬송과 회개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을 의미하며, 그러니까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미혹은 (헬라어 폴리나오(πλανάω), ‘길을 잃게 하다’, ‘나쁜 길로 이끌다’) ‘외부로부터 어떤 유혹에 잘못 이끌림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입니다.
3. 예수님은 재림 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환난의 징조)와 고난의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10-13절
큰 징조들이 있고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나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이 있으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증거입니다. 또 대적들에게 부당한 핍박을 받으면 그것이 심판 때에 상급을 받을 근거라고 합니다(마5:10-12,막10:30). 마지막으로 핍박하는 그들에게 복음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움을 받더라도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이 땅에서 고난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설령 이 땅에서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 미움이 우리 영혼은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도 받을 수 있고 어려움과 상함도 당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은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헌금과 성전의 회복, 고난의 의미와 증거에 대해 말씀하는 것은 이것이 언약의 증거이며 징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