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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2:54-62 “닭이 곧 울더라”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넘겨지고 잡혀가십니다.
1.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갑니다. 54절
베드로는 예수님이 무장한 성전 경비대에게 잡혀갈 때 같이 잡혀갈 용기는 없고 멀찌감치 따라갑니다. 어쨌든 그 결말을 보고자 하여 끝까지 쫓아와 불이 피워진 뜰 가운데 함께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순차적으로 세 번 부인합니다. 세 번 부인하자마자 닭이 웁니다. 마치 베드로가 부인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닭이 울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눈빛과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눈빛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의 이 눈빛은 변절자로 보는 시선이 아니라, 베드로의 참회와 회개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랑의 시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을 하며 회개를 합니다. 우리가 죄짓는 그 자리에 예수님의 시선이 있습니다. 그 시선은 리를 감시나 정죄, 죄책감을 주는 시선이 아니라 돌이키고 회개하라는 따뜻한 사랑과 용서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죄의 자리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쳐야 합니다. 사람의 시선은 지적하고 비난하는 시선일 수 있지만, 예수님의 시선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는 시선입니다(롬5:5-10).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 기록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치는 싸인이 바로 말씀입니다.
2. 예수님을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고 이 외에도 말로 욕을 합니다. 63-65절
예수님을 잡아 왔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고, 말로 욕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멸시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 우리도 예수님을 멸시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세상 사람들은 모르니까 예수님을 멸시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아는 우리가 환경과 상황에 몰려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다면 예수를 모르는 자나 예수를 주로 고백한 자와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환경 때문에 예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쩜 예수를 만난 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 사람들처럼 너무 습관적으로 부인하며 살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왜 부인할까요? 멀찍이 따라가니 그런 것입니다. 예수와 동행해야 하는데, 내가 혹시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예수님의 시선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예수를 죽이고자 합니다. 66, 70-71절
산헤드린 공의회는 장로, 서기관, 대제사장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의 의사 결정 기관입니다.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어 유대교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공회입니다. 이 공회가 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사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형 권한은 로마 총독에게 결정권이 있습니다. 지금은 유월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유월절을 기념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자기들도 기념해야 하고 백성들이 유월을 잘 기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예수를 반란죄로 덮어 씌워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해야 할 일을 안 하니까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을 그 시간에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해야 할 사명,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크리스찬답게 살지 못하는 모습이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