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20120926 [세례 요한의 사역을 통한 교훈]김경수 집사
소감&깨달은 내용
본문은 세상의 왕들이 다스리던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머물러 있던 요한에게 어떻게 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통치력은 마치 조용한 혁명과 같이 이름없는 한 인격체,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사람, 요한에게 그 말씀이 임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왜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 말씀이 임하였고 빈들에 머물던 요한과 그 당시 세상의 권력을 장악한 황제와 총독들은 얼마나 극명한 큰 대조를 보여 "주는지 쉽게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힘과 역사는 광야와 같이 텅 빈 공간, 곧 하나님께서 운신할 수 있는 영적공간이 형성된 곳에 나타난다."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내 삶이 왜 항상 광야에 위치 시켜여만 하는지 알 수 있다. 세례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주었다. 죄 사함을 받는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가능한데 어찌하여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일까 궁금해질 수 있다.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 준비의 세례라 할 수 있다. 주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죄 사함을 받게하는 참된 회개가 가능하므로 요한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준비하여 주님의 복음이 임할때 그 복음을 선명하게 받을 준비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 오늘날 복음의 사역에 있어서도 세례 요한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을 어렴풋이 이해했고 율법의 마지막 주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복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으며 여전이 율법은 가르침의 스승으로 인간이 자신의 죄됨을 깨닫게 함으로써 복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율법의 기준과 거울이 없다면 누구도 자신의 죄의 심각성과 그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죄를 깨닫지 못하면 복음은 그 진정한 가치를 잃어 버리게 된다. 결국 요한의 사역은 주님에게 오셔서 행하실 복음의 사역을 위해 길을 닦는 일에 집중되었다. 그는 첫째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기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광야의 빈들에서 그 허공에서 해체되어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했다. 주님이 오시는 마음의 대로를 닦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의 마음은 이사야 선지가가 말한것처럼 주님께서 들어오시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으로 망가져있다. 길이 굽거나 움푹 파이거나 길이 크고 작은 산등성이로 가로막혀 있다. 회개의 세례를 통해 마음의 모든것을 갈고 닦아서 평탄하게 만들었을때 복음이 막힘없이 우리의 존재 안으로 흡수되도록 준비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는 해머와 같은 말씀의 사역이 필요하다. 그것은 빈들에서 나오는 깊은 묵상과 영적 실체에 대한 강한 붙들림과 인간의 영원한 운명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심취를 통해서만 흘러나오는 불같은 메시지이다. 빈들이 아니고서는 세상의 권력과 부의 "허영이 가득한 땅에서 인간은 참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요한은 열광하는 군중들에게 현혹되지 않았다. 그는 세례를" 베푸는 그 종교적 관행의 성공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영적 실체와 그들의 내면의 동기를 세심히 간파하고 바른 동기와 태도로 "세례를 받을 것을 요청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장차 올 진노와 심판에 대한 메시지였다. 종교적 기득권과 장치안에서" 심리적 안전을 누리는 자들에게 세례 요한은 독설을 퍼부었다. 참된 회개와 변화된 삶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다.
세례 요한은 참된 변화와 진정한 영성의 징표를 요구 하였다. 참된 회개는 삶의 지평에서 이루어질때 그 진정성이 확보된다. 참된 회개란 인격적 돌이킴이다.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나 감정적 뉘우침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나타나야할 삶의 변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한다.
"또한, 종교적 형식주의를 버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민족적 정체성 안에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여 하였다. 이름에" 걸맞는 삶과 행위가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브람함의 자손이리라는 자부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브람함의 자손과 같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회개란 추상적이고 종교적 감성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자리에서 보여 주어야 할 결단 이어야 한다. 그것은 있는자가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며 세리들이 부당징수를 하지 않는 것이며 힘과 권력을 가진자가 약한자들의 것을 탈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곧 회개란 권력의 포기이며 힘의 내려 놓음이다. 요한의 놀라운 사역과 그의 존재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엄중함과 신비로움은 대중으로 하여금 요한을 메시아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기대를 먹고사는 사역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대중의 인기는 사역자의 영혼을 좀 먹는 벌레와 같아서 그 인기에 편승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존재적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의 자리를 선명하게 지키면서 단언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고 자신과 예수님의 존재론적 차별성을 분명하게 이야기 한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다 그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다. 그분은 내가 그 의 신발끈 조차 풀수 없는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을 메시야의 자리에 위치 시키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 21절에서는 예수의 세례받으심을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는 백성이 세례를 다 받을때에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고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낮추사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사함을 위한 세례가 아닌 백성들과의 동질화를 "위한 세례였다. 오늘날 정치,경제,사회,문화면에서 세상을 이끄는 유명인사들이 모두 예수님과 같다면 이 세상은 정말 천국이 될것이다.“
기도
이 세상을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 버리고 살아 갑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필요한지도 모르고 내 생각과 기대를 갖고 살아 갑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똑똑해서 계획하고 진행했던 일들이 잘 성사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위급할때 일시적으로 활용하는 마음씨 착한 수호신 같이 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과 부의 축적에 활용하기도 합니다.
너무도 많은 죄를 행하면서도 그런 죄악을 깨닫지도 못하는 무감각한 실정에 이르렀습니다. 반성하고 회개하는 자들을 오히려 너무 순진하다고 비아냥 거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무릎끓고 하나님께 대면 할 때 뿐 세상에 나아가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크리스찬이 되고 맙니다.
세상에 나가 행한 어제의 악행을 모두 다 망각해 버리고 오늘 성전에 나와서 습관적인 기도를 내 뱉으며 스스로 크리스찬 이라고 자부 하면서 감동없는 달변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외치고 악어의 눈물로 회개를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향기를 세상에 풍기는 것 고사하고 오히려 크리스찬이라 드러내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전도하여야 할 영혼을 하나님곁에서 더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저희들 입니다.
이 모든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게 하시고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을 사랑하고 받드는 성도가 되게 하시옵소서. 모든 악행을 내려놓고 반성하여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세례요한처럼 천국을 여는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준비하고 열게 하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