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장 QT(2012.02.22)
류지훈 전도사
▶ 본문 요약
아하시아의 추락(1-2절)
왕의 사신과 하나님 사신의 대결(3-8절)
벼락 맞아 죽은 두 오십부장들과 그 부하들(9-12절)
선지자 앞에 무릎 꿇은 오십부장(13-18절)
▶ 배경과 상황
아합이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아람 왕국과 싸우다가 죽은 후(왕상 22:29-40),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의 보좌에 오른다(왕상 22:51). 열왕기자는 먼저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인 아하 시야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왕상 22:51-53). 아하시야는 그의 부모가 다스리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사건을 통해 바알의 무능을 많이 목격 하였지만 그의 부모의 죄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그의 집안에 뿌리를 내린 우상숭배의 죄는 너무 깊었고, 이제는 죄의 꽃이 온몸에 피어나고 있다.
믿음의 사람 엘리야는 한 평생 오므리 왕조와 싸웠으며, 특히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혼신의 힘을 다 쏟는 싸움을 치뤄왔다. 그는 아합에게 기근을 선언한 후 이방 땅에 피신을 가서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았다(왕상 17:24).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후, 엘리야는 아합의 바알 선지자 450명과 갈멜산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하는 싸움에서 "기도의 능력"으로 승리하여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인정받는다(왕상 18:21-46; 약 5:17-18). 갈멜산 승리 후 엘리야는 오히려 깊은 좌절감에 빠졌으며 모세의 시내산으로 가서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명감을 새롭게 회복하는 "말씀의 사람"이 된다(왕상 19). 이 후 엘리야는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를 음모에 빠뜨리고 죽이자, "사회정의의 구현자"로서 아합과 이세벨에게 책임을 물어 오므리 왕국의 멸망을 선언했다(왕상 21:19-24). 이제 엘리야는 그의 마지막 사역에서 병들어 이방신 "바알세불"에게 치료의 신탁을 구하러 사자를 보내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 왕에게 "하나님의 전권대사"로 나타나, 죽음의 신탁을 전하며 오므리 왕조가 끝나도록 하고 있다.
▶ 해석 노트
⇒ 1,2a절 엘리야가 선고한 대로(왕상 21:29) 오므리 왕조는‘추락하기’시작합니다. 아합이 죽자 이스라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속국 모압이 배반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모압의 조공 중단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여호와께서 붙드셨다)마저 난간에서‘추락하여’병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던 손을 놓으면 누구든 하나님 대신 붙들던 것과 함께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나는 누구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람처럼 허망한 것을 꽉 잡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 2~8절 아하시야가 에그론 신 바알세붑에게 자기‘사자’를 보내자, 하나님은 자기‘사자’엘리야를‘올려’보내십니다. 그 사자를 중간에서 만나서 왕의 허물을 꾸짖고, 왕이 ‘올라간’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란 말을 전하게 하십니다. 혹시 주님은‘우상’에게 찾아가는 나를 도중에 가로막으시고는,“세상에 하나님이 없어서 그걸 의지하느냐”고 호통하시지는 않습니까?
⇒ 2~8절 두‘사자들’을 통해 아하시야의‘말’과 여호와의‘말씀’이 충돌합니다. 엘리야는 추상같은 정치권력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왕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그는 살아계신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은 신 바알세붑을 좇는 왕 아하시야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참 말’을 품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오늘 나도‘거짓 말’이 무성한 세상에 밀리지 말고 담대히 살아가길 바랍니다.
⇒ 9~12절 아하시야는 외모만으로도 엘리야임을 알아차렸지만, 엘리야는 체포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그 말씀에 붙들려야 할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아합이 죽고, 나라가 무너지고, 부하들이 하늘에서 내린 불에 즉사하는데도 마음을 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명령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임을 거부한 채,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이제는 그만 멈추고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 일은 없습니까?
⇒ 13~14절 세 번째로 아하시야 왕의 보냄을 받은 오십부장은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권위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합니다. 연이은 재앙을 통해 증명된 말씀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고 도전과 반역을 멈추지 않는 불의한 자기 주군의 사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의‘종’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부하들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는 왕과 달리 부하들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호소합니다.
⇒ 15,16절 여호와의 사자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뿐입니다. 아하시야 친위대가 두 차례나 무력시위를 벌이며‘내려오라’고 위협할 때는 꼼짝않던 엘리야가 여호와께서 ‘내려가’라고 하시자‘일어납니다. 그리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의 면전에 섭니다. 그러고는 조금도 에두르지 않고 왕이 침상에서‘내려오지’못하고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전합니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담대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17,18절‘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하시야는 죽었습니다. 아들도 없이 죽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왕상 21장 21절) 오므리 왕조를 여기서 끊어 더는 미래가 없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무력의 힘으로 하나님의 사람을‘내려오게’하려던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서다가 하늘에서‘내려온’하나님의 불에 부하들을 잃더니, 이제 침상에서‘내려오지’ 못하리라는 선고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자 왕의 말은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지만, 하나님 말씀은 고스란히 현실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맞서지 않고 그 권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때, 이 땅의 교회가 앓고 있는 병도 낫고 기력을 얻을 것입니다.
▶ 소감 및 결단
1절을 보니까....
아합이 죽은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우리의 인간관계는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것은 이와 같습니다. 배반....심지어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것처럼,우리도 하나님을 배반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없이 삽니다.
예전에 영화 약속이라는 영화에서 전도연과 박신양의 이야기중에 (전도연에게 박신양이 하는 말......)
... 다른 여자 만나는 것만 배신이 아냐. 니 마음 속에서 날 제쳐놓은 것도 내겐 배신이야...
배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배신이라는 것, 배반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그 자체가 배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이와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늘 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한계요, 연약합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1절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익을 볼만한, 무언가 해줄만한 가치가 있어야만 그 앞에서 따르고, 친한척, 착한 척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하시야 왕의 결국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이 되어, 다락 난간에 떨어져 병들었다가, 누워서 치료중 사망....
사실 우리에게 뭐 얼마나 바라시겠습니까? 바라신다고 우리가 무엇을 해드리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제가 되게 해주세요...
▶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어떠한 상황,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가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아합의 불순종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하시야 왕은 자신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결코 깨닫지 못하였고,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을 체포하려고까지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왕의 모든 궤계를 물리치셨습니다. 주님, 우리가 어느 곳에 거하게 되던지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의뢰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뜻을 쫓아 나아가고,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오로지 주님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저희들이 될 수 있게 붙잡아 주시고, 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송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며,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