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학교 소감문 조화영 집사
어머니 학교 섬김이를 하기까지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이번 어머니 학교를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가지 않으려 했었다. 교회 집사님들께서 어머니 학교를 가자고 해도 나에게는 가지 못할 핑계가 있었다. 2월 19일은 시 아버님께서 팔순 생신이기도 했었다. 내가 이번 만큼은 음식을 제대로 해 드리려고 맘먹고 있었던 터라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솔직한 나의 맘은 힘들다는 핑계로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을 하고 어머니 학교 모임에도 참여 하지 않았었다. 12일 주일 저녁 예배 시간 어머니 학교 팀원들이 찬양을 하는데 왠지 모르는 나의 맘 안에서 ‘나도 가고 싶다. 부럽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예배는 잘 참여하지 않은 내가 그날따라 아들로 인해 참여하게 되었다. 캄보디아 김효선 사모님이 오신다고 꼭 가야한다고 해서 억지로 참여하게 되었다. 억지로 참여하는 맘 가운데 가고 싶다는 맘이 들었지만 이건 괜한 맘 일거야 하고 지나치려 했었다. 집에 가려고 로비로 내려가니! 김경애 사모님과 어머니 학교 팀원들이 모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 학교 참여가 부러웠어요. 저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며 말하고 말았다. 사모님께서 ‘찬양하는데 조화영 집사 얼굴이 크게 보이더라!’ 라고 말씀 하셔서 나는 이게 응답이라 생각 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가자고 했지만 기도를 더 해 보겠습니다. 라고 답했었다. 정현숙 집사님은 기차표 예약을 해주겠다고 꼭 가자고 했었다. 서의숙 집사님은 병원에서 퇴원한지 얼마 안됐다고 하지만 나는 아픈 환자인지도 모르고 집사님께 가자하며 내가 가면 함께 가자고 손가락까지 걸며 함께 가기로 했었다. 이게 바로 응답이 아니겠나 싶어 수요일 날 확실한 답변을 드렸다. 아버님의 팔순 잔치 문제는 시누들이 나서서 토요일 오후 막내 시누 집에서 하기로 하였다. 어머니 학교에 가지 못할 이유는 해결 되었다. 주일이 생신이지만 어머니 학교 참여에 방해 받지 않으려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최선을 다해 섬겨 드렸다. 남편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왜 그렇게 가려하느냐면서 서운한 마음을 비추었다. 주일에도 부모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서운 했지만 나에게는 우선 순위가 있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내가 행복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목포에 가는 이유는 나의 행복이고 기쁨이고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순간적인 지혜였다. 남편이 듣고 허락을 했다. 주일 3시에 출발 -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포 땅을 밟아 보았다. 성문 교회에 도착하니 우리가 일하기에는 아주 많이 열악한 환경들이었다. 성문 교회를 탐방 갔다 온 집사님들은 많이 좋아 진거라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심난해 보였다. 그 지역 목사님들께서도 환경적으로 힘들어 못 할 거라 하셨단다. 주일 첫날 준비 과정 중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해냈다. 어쩜 그리도 다들 하나 같이 일들을 잘 하는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 들이었다. 셋팅하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벤트 회사에 취직해도 손색이 없는 환상적인 커플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황무지에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어머니 학교 하기에 심난해 보이던 장소가 천국 꽃밭에 들어 가 있는 듯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 했다. 다음 날 일을 끝내고 가정집 숙소로 갔다. 34평이나 될 것 같은 가정집에서 집 주인 아들 둘과 우리 교회 남자 집사님 세 명과 편지 팀 일곱 명이서 함께 숙박을 하였다. 여자들은 거실에서 자고 남자들은 방에서 잤다. 환경은 불편하고 집은 냉골이라 동태 되기 딱 좋은 집이었다. 그 순간 우리들은 생명샘 교회에서 파송 받은 특공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학교가 못할게 없는 특수 훈련 받은 분들만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오지로 가게 되면 세상에서 힘든 훈련을 다 받아 볼 거라 생각 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우리들은 세상을 누벼도 못 할게 없을 것 같았다. 첫 날 저녁 얼마나 추웠는지 다들 옷을 껴입고 찜질방을 그리워하며 가고 싶어 했다. 추워서 잠을 못 잔 분들도 있지만 나는 냉골에서도 잘 잤다. 은혜였다. 첫 날 우리에게는 새로운 경험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편지 팀들은 힘들게 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게 참여 했었다. 둘째 날 성문 교회 권사님께서 저녁 근무가 끝나고 어머니 학교 게스트로 참여 하셨다. 집 주인이 오셔서 보일러를 따뜻하게 틀어 주셨고 남자 집사님들은 기숙사로 가게 되었다. 집 주인과 여자 목사님이 합류하면서 더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우리가 묵은 집은 10년 동안 보일러를 틀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로 인해 처음으로 보일러를 틀어 본 것이다. 한 달 가스비가 만 구 천원이 나온다고 해서 반성하기도 했었다. 둘째 날의 어머니 학교가 자정 12시에 끝났다. 숙소에 왔는데 그 늦은 시간에 딸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내가 목포를 내려가면서 아들과 딸이 싸우기라도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었던 일인데 터지고 말았다. 낮부터 손을 살짝 다치고 마음이 상한 일도 있었고 나의 실수 아닌 실수로 성문 교회 권사님께서 발목이 삐게 되었고 내 아이들은 박 터져라 둘이 싸우고 울며 죽고 싶다는 등 마음을 지키지 못할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기쁨이 있었다. 나는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나의 상황들이 있었지만 나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을 주려고 이런 상황들이 일어나나 하며 사고 전환을 하고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마지막 셋째 날 아들 명주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엄마 중학교 국어 선생님께서 교복을 사 주시겠다며 연락이 왔다고 한다. 교복은 구입 했다고 하니 여름 교복을 사 주시겠다며 기회를 달라고 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선생님이시지만 명주를 특별히 예뻐하시고 챙겨 주시려 한다. 둘째 날 마음은 살짝 상했지만 마음을 지키고 기도로 승화 시키니 좋은 소식도 듣게 된 것 같다. 역시 합심, 침묵, 기도였다. 작년 고흥 어머니학교 섬김이를 하던 시기에는 많이 힘들어 다음번에는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하며 내 자신에게 맹세를 하기도 했었다. 그 때 나는 여호수아 프로젝트 1기 참여와 어머니학교, 자녀 축복 기도회 총무, 셀장, 철야 예배 중보 팀, 샘파 섬김이 등 각종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가진 재물도 없고 섬김이 할 상황도 아니었다. 지금도 상황은 똑 같은데 하나님은 그 때와 다름을 알게 하셨다. 교회 안 섬김이를 하면서 감사하지 못하고 억지로라도 하던 봉사가 나와 우리 가정에 축복이었다. 불평, 불만으로 한 봉사라 힘은 힘대로 들고 짜증도 나고 감사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순종하니 회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이번 어머니 학교를 통하여 나에게 행복의 선물을 주셨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값지고도 큰 선물을 받았다. 어머니로서의 섬김과 배움을 통해 우리 가정이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며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나는 일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축복이 있음을 확신하고 감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