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나눔

2013년7월26일 금요철야간증- 최빛나자매

작성자 관리자 날짜2013.07.27 조회수91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내가 청춘을 잃었다고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청춘을
어느 누구보다 굵고 신나게 즐겼고, 그리고 시련도 굵고 깊게 경험해 본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모든 것을 함께 다 얻은 샘이다. 그래, 결코 잃은 것이 아니다. 얻은 것 뿐이다.



 



 



나는 6살때 부모님을 따라 필리핀으로 선교를 떠났다. 돈도 없었고, 먹을 것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자리가 행복했고
감사했다.



 



그러다 고등학생때, 주님의 은혜로 우리 가정은 재정적으로는
감히 감당 할 수 없는 국제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동생들과 공부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워졌다. 현지
학교를 다니다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이곳에 진학하게된 나는 뒤쳐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짧은 시간 안에 리더쉽을 인정 받았으며, 선생님들도 어느 명문대학을
가게될까 궁금해할 정도로 실력을 키우며 동생들과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을 몇달 앞두고 나의 몸은 이상하게 말을 듣지 않았다.



“과로했나 보구나. 쉬어가면서 하라는 뜻인가...”라고 밖에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골이 빠게질 것만 같은 통증을 이기지 못해 응급실로 실려가게 되었다. 너무
아파서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진통제 몇 알을
주며 집에가서 쉬라고 했다.



 



결국, 다음 날 시험에서는 낮은 점수를 받았고.



대학 준비도 마음편히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는 그렇게 졸업을 하였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일년을 쉬었다.



학교에서는 럭비팀 캡틴, 12학년 학생회장, street children charity, 등등, 안해본 것이
없다. 열심히, 신나게, 즐기며
공부하고 활동하고 찬란한 미래를 기도했다.



 



낙담도 잠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반드시 있을거야”라고
믿었고,



명문은 아니지만 미국에 있는 작은 크리스천 대학에 입학을 했다.



공부가 쉬워서 그 당시 시간이나는대로 학교 및 교회 활동을 많이 하였다.



일학년부터 돈도 벌고, 학생회 임원도 하고, 이학년때는 학생회 회장 및 교회에서는 청년부 부회장으로 열심히 섬겼다.



 



그러나 고등학교때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활약도 잠시.



몸은 또 다시 말을 듣지않기 시작했다.



대학 일학년때는 갑자기 기절할 뻔하다 정신을 차렸던 적이 있었고,



대학 이학년때부터는 다시 골이 빠게질 것 같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응급실고 실려갔지만 아무 이상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나는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이겨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해맑고, 씩씩했기에,



머리와 잇몸까지 – 얼굴 전체에 통증은 너무 심했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증상들이 아니어서



사람들 앞에서 아프다는 말을 편하게 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나의 말을 믿지않을 것만 같았다.



 



매일 새벽 2-3시면 통증이 치를 달아서



캄캄한 방에서 룸메이트들이 깰까봐 혼자 조용히 울다가



해가 뜰때가 되서야 지쳐서 잠이 들곤 했다.



 



, 머리, 잇몸과
골이 터질 것 같았다. “이것도 지나가리” 기도했다.



 



5 개월을 가까이 매일밤 코피를 흘렸다.



미국 병원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매일 진통제를 먹으며 참았다.



조금만 참으면 방학이니까 한국에 가서 전검을 받아야지.



그러다 못 참고 필리핀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해서



죽기 싫다고 울어버린 적이 한번 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몸이 쓰러질 것 같으면



화장실 가는 척을 하면서



화장실에서 혼자 숨쉬기 등을 하며



자신의 몸을 추스렸다.



몸은 매일매일 더 악화되고 있었다.



 



마침내 여름방학을 하여 한국에 정밀검사를 받으러 떠났다.



내 두 손은 얼음창 같이 차갑고 굳었었다.



여름 방학 두달 동안 열심히 치료받고 다시



공부하러 와야지 생각하며 떠났었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나의 몸은 최악을 달리기 시작했다.



병원, 치과, 이빈인후과, 한의원, 조직 검사 수술...



안가본 곳이 없이 다 다니며 검사를 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코피는 끊기지 않았고, 피는 더 자주 더 오래 그리고
많이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밤, 온 몸에 통증이 너무 심해 울면서
나는 다시 응급실로 실려갔다. 택시 안에서 아파서 펑펑 울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병원에서는 진단 결과를 찾아내기 위해서 열흘동안 단식을 하라고 했다.



밥도 물도 아무것도 없이 병실에 누워 있었다.



하나님 아시죠? 하나님
나 보고 계시죠?”



밥을 못 먹은지 3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기력이 없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으로 기도하고 대화를 했다.



소리내어 찬양도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소리를 낼
힘이 나지 않았다.



 



내 앞에 앉아계신 부모님께 감사의 말, 사랑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힘이 없었다. 기가 다 빠진 상태에서 나는 그저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더 깊은 대화를 하였다. 마음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아뢨다.



하나님은 말이 아닌 나의 생각과 마음을 다 아시니까.



어렸을때부터 세계선교가 비전인 나는, 



아플때, 지독한 약을 마셔야할때마다,



“이것도 못 이기면 세계선교를 못하지”라는 신념으로 버텼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자 나는 생명샘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고, 교회를
참석하게 되면서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배려와 사랑은 나를 감동 시켰다.



그렇게 생명샘 교회를 출석하며 훈련을 받았고,



한편 병원에서는 종양이나 암 일수도 있다며 독한 약만 6개월
동안 계속 먹게 하였다. 그러나 이유도, 아무 설명도 없었다. 아무 진전이 없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 딸의 회복을 위한 예비하심이 따로 있으셨다.



당시 미국에서 내가 교제했었던 형제가 펜실베니아 Hospital
of University of Pennsylvania (HUP)
병원에 있는 최고의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은 것이다. 덕분에 병명을 찾기 위하여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서 약부작용으로 이미 고생했었기에



후각도 잃었고, 코뼈와 잇몸 뼈도 잃었고,



피부도 약부작용으로 인해 불근반점들이 솟았다.



얼굴은 코피를 많이 흘려서 창백했다.



 



미국 공항을 도착했다.



문은 내 앞에 있는데,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당시 교제중인 형제는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나는 그가 처음 만났을때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예뻐 보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이 이런 모습이라도 보이며 나는 문 밖을 나갔다.



 



나는 내 얼굴을 가렸다. 내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그 사람은 예쁘다며 진정성 있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 주었다.



나는 휴학했던 학교 공부도 시작했고, 목회자인 그
사람은 full-time에서 나를 돌보기 위해 part-time 목사로
사역을 했다.



 



미국 이비인후과에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해 나를 결국 암전문부서department
(oncology)
로 옮겼다. 결국 펜실베니아 병원에서도 무엇인지 알수가 없어서



하버드에 있는 의사진들에게 연결을 시켜 주었다.



 



하버드에서는 온갖 희귀종들만 돌보는 나이 많으신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빨리 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주께서는 인내하라고 기다리라고
잠잠하라고 하셨다.



나는 부을때로 부워서 거울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가장 어둡고, 아프고, 불확실한 시간들이었지만,



이때 또한 가장 행복하고, 걱정없고, 자유한 시간들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 사람의 눈에는 나의 망가진 몸이 보인 것이 아니라,



나의 영이 보인 것이다. 그는 나, 최빛나가 보였다.



 



2011 1, 의사 선생님 말씀이 맞아 떨어졌다. 이것은 종양도, 암도 아니었다.



나에게는 아주 특이한 종류의 면역성 장애로 인한 사건이라며 이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에게
나를 연결해 주셨다.



 



Dr. John Stone. 평생 잊지 못할 분이시다.



그 당시 내게 처방된 주사비가 2천만원이 넘었다. 나는 한번 맞을때 두데의 주사가 필요했고, 그것을 마련할 재정은
없었다.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신 의사선생님께서는 진료비를 받지 않으시고 치료과정을 진행해 주셨다.



 



하버드에서는 내가 이 병명으로 13번째 환자다.



아마 한국에서는 첫번째 환자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결혼식 하기 두 주 전에 치료를 위해 필요한 주사를 처음으로 받게 되었고,



아직 통통하게 부은 상태에서 웨딩마치를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겉모습이나 인물이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축복 안에서 은혜로운 결혼식을 올렸다.



 



후각을 잃은지 3년째다.



그러나 몸은 어느때보다 건강하다. 편안하다.



지금도, 몸이 다 나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키셨고, 여기까지 인도해주셨다.



 



나는 섬김 받는 것을 배웠고,



남편은 섬기는 것을 배웠다.



사람이 감히 생각하고 바래서 만들어진 삶의 스토리도 아니고



하나님만이 엮으실 수 있는 관계라고 믿는다.



 



얼굴도, 잇몸도, 이빨도
되찾았다.



주사를 맞으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강건하다.



 



산다는 것은 황홀한 것이다 – 박승호 목사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맞아, 산다는 것은 황홀한 것이야.



 



사랑하는 남편과 세계로 나아가 이 복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다.



 



아프고 힘든 사람들에게 손을 뻗고, 기도해 주고,



사랑해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하나님의 딸이 되고 싶다.



 



하나님께 나의 삶을 드린다. 그분께 모든 것을 그저
맏기련다.



 



살아있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와 사명이 있다는 뜻이
아니한가?



 



고난과 역경이 오늘의 나와 남편을 만들었다.



 



이렇게 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지금도 바로 옆에서 감찰하시고 역사하신다.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당신이 희망과 소망을 버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데로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신답니다.



 



오직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빛이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