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2024년 5대양 6대주 대륙선교를 위하여
4진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쿠바 이범찬, 강혜란 선교사님 소식을 전달드립니다~!
1. 자기 소개
저는 강원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경건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교회 안에서 신앙이 좋은 많은 분들이 그랬듯이 저의 부모님도 저를 임신하셨을 때에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이 아이도 저 목사님처럼 탁월하게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 도하며 서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목사가 될 운명으로 자라났습니다.
특별히 우리 집은 수퍼마켓을 하였는데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한 친구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정을 주셔서 라면, 고ᅡ자, 아이스크림 등을 나누어 주 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너무나도 멋있어 보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여름방학 때 농활오던 대학생 형 누나들입니다. 그분들을 보며 막연하게 저도 크면 저런 일들을 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막연한 꿈을 꾸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마천중앙교회(현 마천세계로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운명이기에 자연스럽게 신학대학으로 진학도 했습니다.
저는 신학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부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비전도 의미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언가에 꽂히면 무슨 일이든 하지만 그렇지 않은데 의무감으로 해야 하는 일은 잘하지 못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던 중 새롭게 청년부를 맡으신 목사님이 농촌 봉사활동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저는 우연히 지리산에 답사 현장에도 동참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저는 완전히 180도 달라진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농촌사역에서 저는 어마어마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아무도 저를 막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청년부의 찬양인도를 하기 시작했고, 금요찬양팀 총무, 고등부 찬양인도, 청년들을 불러 모아 새벽기도 참여운동, 그 후에 성경통 톡, 수요예배 후에 청년들이 모여 또 다시 집회를 하였는데 제가 그 때부터 설교도 했습니다. 모임이 없는 요일은 마음 맞는 사람들과 모여 성경공부를 하며,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청년부 회장도 되고, 이듬해에는 지역 청년 연합회도 결성하고 선교축제, 체육대회, 마을 청소 등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그 안에서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늘 그 부흥을 꿈꾸며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임전도사로, 부목사로 8년 정도 지났을 때에 무언가 고갈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던 당시 전임 임지도 많지 않았고, 많은 분들이 더 공부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선 현장을 경험하고 싶었고, 현장에서 부딪쳐 보다가 실제로 목회현장에서 어떤 공부가 필요한지를 깨닫게 될 때에 공부를 하겠노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야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풀타임으로 8년 정도 지나니 고갈되는 것을 느꼈고, 공부가 필요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풀러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들이 저를 계속 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유학을 준비하기에는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도 도와 주실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떠나라는 마음이 계속 내 안에서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떠나면 책임 져 주시겠다는 마음이었습니 다. 그야말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아브라함의 시험처럼 느껴 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섬기던 평광교회에서 너무나 행복했기에 그 부르심을 계속 못들은 척 했습니다. 그러다가 허리 디스크가 생겼습니다. 거의 목회를 할 수 없을만큼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이 상태로 계속 있는 것은 교회에 너무나 큰 폐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떠나면 허리도 낫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결단을 내리고 유학을 준비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떠나기로 결단했습니다. 떠나기 하루 전날까지 예배 시간 한 시간 조차도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여서 뒷 자리에서 서서 예배 드릴 정도였는데 떠나기로 결단을 내리고 비행기에 오르니 순간적으로 허리 통증이 사라지고 긴 비행도 문제없이 갈 수 있었습니다. 풀러신학교에서도 일주일간 하루 종일 진행되는 수업도 문제 없이 다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자 마자 사역지도 허락하여 주셨고, 아내도 베이비시터로 일할 수 있었고, 전례가 없어서 예상치도 못했는데 평광교회에서 전액장학금을 지원해 주셔서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부족함 없이 살 수가 있었습니다. 순종하면 책임 져 주시겠다는 말씀이 그대로 응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완전히 책임져 주셨습니다. 저는 학위를 마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제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상치도 못하게 이민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민목회에 대해 비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이민목회를 하게 하셨나 의아했습니다. 저는 청년시절 농촌봉사 다니던 때를 늘 마음에 그리며 목회를 준비했는데 이민목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섬기는 교회만이라도 생명력이 넘치게 해 보려고 선교에 대해 도전하며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습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를 선교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집중적으로 선교할 나라를 찾다가 주신 나라가 바로 쿠바입니다. 교회적으로 선교하려 했는데 몇 번 의 단기선교 다니다가 직접 와서 하라는 부르심을 느꼈을 때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직접 와서 보니 왜 부르셨는지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에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저를 더욱 온전하게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비전에도 없던 미국에서의 이민목회를 왜 경험하게 하셨나 하는 의문이 풀렸습니다.
미국에서, 타문화권에서 사람들과 사귀고 어우러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쿠바 선교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저는 언어에 은사가 없는 편입니다. 오래 미국생활을 하면서도 영어도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쿠바에서 쿠바식 스페인어를 배우려고 애쓰는 데도 잘 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느끼게 해 주시는 바도 있습니다. 제가 말을 잘 했더라면 동역자들에게 이런 저런 충고와 조언으로 자꾸 가르치려 했을 것 같습니다.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더 질서가 잡히고 체계도 잘 세워 졌을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저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고 가족처럼 여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신뢰 해주고, 속아주기도 하고, 포용해 주고, 지원만 열심히 해 주었기에 지금의 관계가 형성 된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 다. 또한 강단에서 입으로 하던 설교를 삶으로 하는 현장이라는 것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쿠바로 올 때에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갈때에 이미 그 문제는 뛰어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선교 훈련도 받지 않고 파송교회도 없이 맨 땅에 헤딩하듯이 시작한 사역들인데 사역을 만들어 나갈수록 모든 것 을 할수 있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날마다 체험합니다.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 물질이 부족해서 못한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넘치지도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인간관계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채우시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저를 자랑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자랑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을 책에서만 읽고 알았는데 선교 현장에서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은사 테스트를 하면 믿음의 은사가 가장 높게 나왔습니다. 저는 많은 은사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큼은 분명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그 믿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2. 가족소개
제 아내 강혜란은 한국에서부터 어린이집 교사로 오랜시간 살아 온 사람입니다. 미국에 와서도 데이캐어 교사로, 지금은 한 초등학교의 보조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데에 탁월한 사람입니다. 자녀들도 믿음으로 잘 키웠 고, 쿠바에 오면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여러 가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결혼하기 전부터 선교사로 헌신했었던 사람입니 다. 저에게도 목회 어느 정도 하다가 아이들 대학에 보낸 후에 선교하러 가자고 끊임없이 이야기 해 오던 사람입니다. 처음에 쿠바에서 가 족들이 다함께 살 수있는 방법을 여러 방면으로 찾았지만 공산국가이기에 비자를 받을 수도 없었고, 함께 살 수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파송교회도 없었기에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직장에 다니며 지금도 아이들을 키우고 있고, 쿠바에서 선교하 고 있는 저를 후원하는 최고의 후원자이며 동역자입니다. 매일 퇴근하고 돌아오면 저와 전화 통화를 합니다. 쿠바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가장 행복해 합니다. 아이들 방학 때 두 번 다녀가기도 했기에 나눌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기회될 때마다 오려 합니다. 아이들 대학 보내고 후원 상황도 좋아지면 함께 와서 살면서 할 일들을 지금부터 꿈꾸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목회를 할 때에는 생각이 달라 의견이 충돌 될 때도 많았는데 선교할 때에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음에도 마음이 하나로 합해져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내는 선교사가 비전이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훗날 쿠바의 아이들을 위해 여러 가지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딸 하영이는 엄마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아내가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딸이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 당시에 담임목사님의 사모 님이 늘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딸이었고 늘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에서 사모님의 외로움이 덜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 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첫째는 딸이기를 바랬고 바람대로 딸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바람과 기도대로 지금도 엄마의 가장 좋은 친구로 살 아가고 있습니다. 그 기도가 너무 강했는지 하영이는 내성적이라 친구가 많지는 않습니다. 아시안이 거의 없는 지역이기에 더 그럴 수도 있 습니다. 그래서 더 엄마와 가깝게 지냅니다. 하영이는 아빠가 약한사람을 도와야 하는 것에 중요성을 늘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자라났습니다. 하영이가 도와야 할 약한사람은 누구인가를 찾던 중 병원의 환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영이는 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행복해 합니다. 그래서 발론티어로 병원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일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의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의사가 되기까지 시간도 너무 길고, 경제적으로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NP라는 직 업이 의사들이 하는 역할을 하고, 되는 것도 수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간호학을 공부해야 하기에 올해 8월에 케이스웨스턴리저브 대학에 입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영이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정해진 행복한 사람입니다.
둘째인 아들 온유는 누나와는 반대로 외향적인 아이입니다. 친구도 많고 운동을 좋아합니다. 특별히 야구를 좋아하고 잘 하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고, 올해 유일하게 모든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위스콘신 전체 주 에서 이 주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레슨 한번 시켜 준 적도 없는 데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 다도 기특한 것은 경기에 나가기 전에 항상 기도하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일 아침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합니다. 꿈은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입니다. 더 큰 꿈은 메이저리거가 되어 아빠의 최고의 후원자가 되겠다는 말합니다.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지만 마음만은 참 기특하게 여겨집니다. 쿠바에서의 동역자들이 기도하고 있으니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용돈을 넉넉히 주지 못하니 13살부터 여러 아르 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야구 심판, 농구 심판, 방과 후 학교 보조교사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15살부터는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창문 닦는 기구를 구입한 후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서비스 가격을 흥정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구두쇠인 아이가 누나와 함께 쿠바의 생수의 강 교회의 창문과 문 공사하는 일에 사용해 달라며 후원금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이미 저에게는 최고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처음 쿠바에 왔을 때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던 중에 택시가 고장이 나서 멈추는 위험한 상황도 있었고, 숙소는 계속 정전, 단수로 힘든 상황이었고, 먼 길을 걸어다니니 아빠가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직접 정성껏 만들어 온 선물들을 손수 홈리스 분들에게 나누어 드리고, 축구팀 아이들에게 유니폼을 입혀주고, 콜라와 간식을 나누어 주고, 한글학교에 가서 직접 라면을 끓여 봉사하며 선교에 동참해 주었습니 다. 그 이후에 그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그 동안 아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 었는데, 이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완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 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저를 목사로 만든 순간 저를 하나님께 드렸기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오히려 매달 선교후원금을 보내 주시며 자랑스러워 하시고, 아내도 저보다 더 선교에 열정적이기에 혼자 고군분투 하는 모습이 안쓰럽긴 하지만 크게 미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빠가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 고백을 해 주니 무언가 나를 누르고 있던 것들이 한 순간에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도 마음은 모두 쿠바로 향하여 있습니다. 쿠바를 위하여 우리 가족을 써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쿠바 선교 사역 현황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이 말씀은 쿠바로 부르심을 받고 쿠바로 올 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말씀이 저의 모든 사역의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만 준비했지 선교사로서는 어느 것도 준비한 적도 없고 훈련받은 적도 없기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매일매일 기도하며 사역들을 펼쳐갔습니다. "하나님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제가 위로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요?" 그렇게 기도하며 하나씩 하나씩 사역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저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돌아보니 세 가지로 방향성이 정해졌습니다. 첫째는 작은 교회, 둘째는 어린 아이들, 셋째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여러 사역들이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이 범주에 속하는 일들 중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느끼게 해 주시는 일들이라면 무엇이든지 계속해서 순종해 가려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쿠바 땅에서 펼쳐주신 하나님의 이야기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작은 교회
첫째, 돼지사역
작은 교회들을 위해서 돼지 사역을 펼쳐가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 또는 가정교회 목사님들 가운데 이 사역에 관심이 있고, 돼지우리도 준비가 된 분들에게 어린 암돼지를 선물 해 드립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사료를 제공해 드립니다. 잘 키워서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는 다른 작은 교회에 선물하는 것이 단 하나의 조건입니다. 현재 쿠바의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인지 중간에 돼지가 죽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포기하고 잡아먹기도 하고, 도난당하는 경우도 있어서 실망할 때도 있지만 끝까지 신실하게 잘 키워서 교회를 세워가는 분들을 보며 위로받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로 지원하며 함께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둘째, 교회 건축,음향시설 지원
제가 협력하는 교회들은 작고 열악한 교회들입 니다. 많은 지원을 받아 건축가를 통하여 크게 짓는 교회들도 있지만 제가 지원하는 교회들 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직접 벽돌을 쌓아올리며 짓는 교회들입니다. 생수의 강교회(루이스 목사님 시무)의 창문과 문 공사를 지원하였고, 지금은 바닥과 벽과 천장 공사가 진행되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손 교회(알프레도 목사님 시무)는 에어컨 설치, 샤워 사역을 위한 화장실 공사를 하였고, 최근에 음식을 만들기 위해 부엌공사도 완료하였습니다. 피아노와 마이크와 앰프도 지원하여 예배가 더 풍성하게 되었습니 다. 그리스도의 교회(알렉시스 목사님 시무)는 최근에 의자를 교체하였고, 6월부터는 확장공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2. 어린아이들(다음세대)
첫째, 축구사역
쿠바에 와서 처음으로 시작한 사역이 축구사역입니다. 맨발로 다 떨어진 축구공으로 축구하는 아이들을 보여 주셔서 축구팀을 만들고 축 구화와 축구공을 제공해 주고, 다른 교회들과 시합하고, 끝나면 음식 을 제공하며 점점 더 활성화 되어졌습니다. 현재는 세 번째 팀을 만들어 가는 중입니다. 모든 팀에 코치를 세워 코치가 아이들을 훈련시키 고, 축구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세워갈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면 지역 리그에도 참가하고 있습니다.
둘째, 한글학교 지원
쿠바의 한인선교사님들이 가장 많이 하는 사역이 한글학교 사역입니다. 그 중에 목회자가 속하지 않은 한글학교가 가장 중심에 있는 무세오 한국문화센터에서 하는데 신앙이 없는 교장 선생님의 부탁으로 여러 가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프린터기, 노트북, 학용품 등으로 지원하고, 한국을 좋아하는 아이들이기에 한국 라면, 한국 커피, 초코파이 등으로 음식을 제공합니다. 열심히 섬기다 보니 친구들중에 교회에 가고 싶다는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현재는 5명의 아이들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3. 가난한 사람들
첫째, 홈리스 사역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쓰레기통을 뒤지던 중 스파게티를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먹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파리떼가 득실거리는데도 먹으려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고 다가가 드시지 못하게 하고 스파게티값을 드리면서 이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처참한 상황 가운데 있는 분들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제공해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역을 하고 있었던 알프레도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홈리스 출신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님이 되신 분입니다. 이 목사님은 자기 코가 석자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하긴 했지만 오랜 시간 지나며 많이 지쳐 있었고 거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저를 보내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 현장에 갔을 때 20명 정도의 사람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음식의 질을 높이고, 명함 카드를 만들어 홈리스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수요일 금요일 저녁에 120명에서 150명 정도 모입니다. 스파게티, 빠에야, 도넛 등으로 섬기는데 봉사자가 20명 정도 됩니다. 음식을 나누기 전에 찬양과 기도 그리고 복음선포의 시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소망이신 주께로 나아오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에는 교회로 초청하여 이발, 샤워, 세탁, 음식제공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홈리스 사역이 현재 위기에 처해있는 쿠바에 꼭 필요한 사역이기에 또 다른 지역에서도 시작하려고 기도하던 중 리카르도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만나 아직은 더 교제해 보아야 하겠지만 지금까지는 이 사역을 잘 만들어 가실 분으로 보여집니다. 이 목사님은 마리아나 호 지역에서 5월부터 이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우선은 매주 화요일 한 번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30명 정도의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봉사자들이 세워지고, 더 많은 분들을 섬기기 위해 준비 해 가는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목사님과 봉사자 들만 준비된다면 더 많은 지역에서 이 사역을 펼쳐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둘째,한인 후손심방
쿠바는 10%의 사람들만 잘 살고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 중에서 한인 후손들이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이분들에게 마음이 쏠리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들을 찾아가 생필품과 생 활비를 지원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단기선교팀이 오셨을 때 50여 명을 초청하여 한국음식을 정성껏 차려드리고 아리랑, 고향의 봄, 애국 가 등을 함께 부르고 귀한 선물도 드리니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하셨습니다. 더 자주 만나고 음식도 대접해 드리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드리려 합니다.
셋째,병원사역과 교도소사역
현재 쿠바는 병원에도 약이 부족하여 큰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무상교육, 무상의료로 잘 알려진 나라이지만 의약품이 부족하고 의료기계들도 낙후되어있는 상태입니다. 거동이 가능한 환자들을 홀에 모아서 함께 예배드리고, 음식을 나누어 드립니다. 저는 직접 병실까지 갈 수는 없어서 우리의 봉사자들이 음식을 가지고 거동이 불편한 분들은 직접 찾아갑니다. 병원에 필요한 의약품들을 제공함으로 환자들의 치료를 돕고 있습니다. 교도소도 직접 들어갈 수는 없기에 봉사자들이 가져갈 수 있는 음식과 생필품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현재 쿠바 땅에서 지극히 작은 소자가 누구인지를 찾고 그분들을 잘 섬기려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일이라면 아무리 부담스러운 일일지라도 믿음으로 펼쳐 갈 계획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실망이 되고 낙심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삶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위로의 전달자라는 이 말씀이 저를 계속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 말씀과 사명 끝까지 붙잡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기도제목
1. 공산국가이기에 여전히 신분의 노출의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여러 사고의 위험도 있고, 전염병의 위험도 있습니다. 안전하고 강건 할 수 있도록
2. 모든 일이 그렇지만 특히 선교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사 역할 수 있도록
3. 하나님께서 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때마다 귀한 동역자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동역의 귀함을 알고 그분들과의 신뢰를 더욱 공고히 하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도록
4. 홀로 직장에 다니며 아이들을 양육하고, 선교까지 지원하는 아내가 영육이 강건하고, 대학진학을 앞둔 딸 하영이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아빠의 최고의 후원자가 되겠다는 아들 온유의 앞날을 위하여
5. 하나님께서 매 순간 보여주시고 느끼게 해 주시는 것들을 잘 캐 치하고 끝까지 순종하여 이 모든 일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자랑하며 간증할 수 있도록
쿠바 땅과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고 계시는 이범찬, 강혜란 선교사님을 위해 중보 부탁드립니다!
빛이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