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평안히 가라

이성찬 목사 / 눅 8:4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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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좇기는 인생살이, 여유를 원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 반대방향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왜 이렇게 분주하게 사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보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분주하게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추구는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평안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은 오직 평안으로 일관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비결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자.

1. 예수님의 평안- 급박한 현실에서도
눅 8:41-42a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회당장인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엎디어서 간청한다. 간청이 아니라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대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12년을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타난 것이다. 갑자기 끼어든것이다. 긴급한 상황 가운데서 중간에 일이 끼어들면 순간적으로 사람들은 판단력을 잃어버린다.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게된다.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평안의 모습을 지니고 계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평안을 빌어주신다. “평안히 가라”라고 말이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평안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평안을 가지고 가라고 볼 수도 있다.
좆기는 삶, 분초를 다투는 생과 사의 현장에 주님이 계셨다. 분주함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늘 하나님 앞에서 서있었기 때문이다. 이 주님의 절대적인 평강이 우리의 평강이 되기를 기도한다.

2. 예수님의 평안-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눅 8: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상황은 악화되어진다. 어린 딸의 상황은 악화되고 악화되어서 마침내 그 딸은 죽는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죽었다고 절망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죽음의 공간으로 과감하게 들어가신다.
눅 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죽음 앞에서도 주님은 믿음을 선포하신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신다. 송장의 손을 잡고 예수님의 희망을 말을 선포하신다. “아이야 일어나라.”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주님은 우리의 절망을 향하여서 말씀하신다.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말이다.

3. 예수님의 평안-주변의 비웃음 가운데서도
눅 8: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사람들의 비웃음을 참아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이런 비웃음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비난과 조소 가운데서도 우리 주님은 평안을 지키신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서 있다. 그는 그의 여정을 온전히 하나님의 손길에 맡겨버리는 삶이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의 평안-성공과 기적 이후에도
눅 8:56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하시니라”
아이를 살리신후 예수님은 그 부모에게 경계한다.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다. 왜 이렇게 했는가?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을 배려하는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알게되면 예수님을 비난한 사람들은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자신을 비난한 사람들까지도 배려하시는 너그러운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조용한 매듭’을 지으신다. 자신을 비난 하는 다수의 군중까지도 배려하시는 예수님의 이 마음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간절함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