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교회(1)

박승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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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01년 1월 28일 주일낮 강단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교회』(1)
성경 갈 2: 16-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 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 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

신앙은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문제가 아니며, 죄냐 아니냐의 씨름만도 아닙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산다는 데에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올해 우리 생명샘 교회의 표어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교회`입니다. 이것은 내 마음 안에 그리스도 로 가득찬 것을 말합니다. 내가 성전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론을 통하여 구체적인 푯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막의 문은 구원의 문제를 이야기합니 다. 우리의 신분이 변한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는 것입니다.
문에 들어서면 번제단이 있습니다. 번제단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죄를 없이 하고 씻음 받고 정결케 되 고 죄용서를 받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삶은 뜰과 번제단에서 그칩니다. 그러나 신약은 지성소에 들어감이 목적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는 시은좌(施恩座)입니다. 시은좌는 지성소 안의 법궤입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의 뚜 껑이 바로 시은좌입니다.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2마리의 양을 취하여 그 중 한 마 리는 광야로 내 보내고 나머지 한 마리는 잡아 반은 백성에게 뿌리고 나머지 반은 시은좌인 속죄판 위에 부음으로 하나님께서 은혜의 보좌에서 백성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날마다 이 시은좌에 나아가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 대제사장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 구약의 양의 피와 예수님의 피의 목적은 다릅니다.
양의 피가 씻음이 궁극적 목적이었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피의 목적은 지성소에 들어가 주의 영광을 뵙 고, 대제사장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 길은 새롭고 산 길이라고 말씀합니다(히10:19-20).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 말씀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 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덕을 선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광고한다는 것입니다. 왕권을 가진 대제사장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우스입니다. 성막을 통해 우리의 기업을 미리 보게 하십니다. 성막의 구조 는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뜰은 죄를 씻음 받는 단계입니다. 성소는 공급받고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지성소의 삶이란 하나님을 뵙고 나와서 백성을 섬기고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사장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주는 삶, 생명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고 씻음 받음은 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물두 멍부터는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는 자기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은 무엇입니까?
두가지 사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지성인인 어느 대학생이 열등의식에 쌓여 우울증으로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까지 왔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형이 머리가 큰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데 너는 머리통이 작 아서 안된다 라는 농담을 했습니다. 그후 그는 머리의 크기에만 신경을 쓰고 어떤 사람을 봐도 머리의 크 기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일류대학에 진학을 했지만 무의식 속에서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실재를 검증합니다. 인지 전환, 사고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중 고등학 교의 성적을 확인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한 사실들을 검증하여 정말로 못하고 있는가를 물어보는 것입 니다. 틀린 사고를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실재와 다른 가치관을 바로잡는 것입 니다.
또 한사람은 대학교수인 어느 여자입니다.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딸만 예뻐하 고 아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남자에 대해 분노하고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결혼 후 박사 과정을 밟으 며 원치 않는 임신을 했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일이 힘들 때마다 뱃속의 아이를 원망하고 미워했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공부를 마치고 교수가 되었으나 출산 후 4년 동안 시부모님이 아들을 양육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는 자기를 길러주신 조부모님을 더 따르고 엄마로 존중하지 않는 것 같습니 다. 그래서 둘째 딸을 낳았을 때 뺏기지 않으려고 하고 특별한 사랑과 배려로 키워서 관계가 잘 형성되고 점점 더 이 딸을 편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교수는 5남 1녀중에 늦게 난 딸이어서 남아 선호 사 상으로 하위 서열 딸로 찬밥 신세였던 것입니다. 남아선호에 분노하게 되고 남자를 거절하는 구조로 발 전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자동적 사고`라고 말합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몸에 벤 어린시절의 경험이나 과 거의 사고의 틀이 그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 왔어도 옛사고, 옛가치 관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기 부인은 선, 악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아닌 하나님 중심, 타인 중심, 이웃 중심의 구조를 가지는 것입니 다. 입술은 자기 부인을 말하면서 삶은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부인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광야의 훈련과정이 바로 자기부인의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를 섬기는 애굽의 삶에서 모세를 따라 나선 이유는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할 하나 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의 자리에 하나님을 앉히고 떡과 빵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 니다. 자기 기대치와 욕망의 신앙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광야에서 사 라져 갔습니다. 곧 자기 부인에 실패한 겁니다.

나 중심의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사고를 전환하고 진리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으로 부르신 목적입니다. 자기 주장을 떠나지 못한 사람은 제사장일 수 없습니다.
직면(confrontation)은 자기 부인의 과정입니다. 칭의의 단계까지는 격려하십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에게는 자기 문 제를 보도록 직면케 하십니다. 자존감의 문제, 외모 등의 문제등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하나 님은 타인을 통하여 이런 문제를 건드리게 하셔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 하십니다. 불편하고 상처가 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를 타인을 통해 주님이 직면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처를 받거나 회피, 공격의 문제가 아닌 해결해야 할 물두멍의 단계입 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직면의 단계에서 좌절해 버립니다. 그러면 더 이상의 인격의 변화,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에 의해 컨트롤 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사건, 부모의 양육 패턴, 친구와의 만 남이 각인 된 마음 바탕 위에 성경의 진리 몇가지를 플러스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위합니다.
축복을 기대하고 빵이나 외로움의 해결, 돈 등으로 채워지길 기대하나 직면의 과정에서 깨지게 하십니 다. 자기 부인은 어렵습니다.

아내가 계란 후라이를 반숙으로 해서 남편에게 주었더니 그 남편이 화를 내며 완숙을 해야한다고 말합 니다. 둘 사이의 싸움으로 해결이 안나서 그 동네의 유력한 사람에게 찾아가서결판을 내려고 했습니다 . 그러자 그 사람이 계란을 톡톡 깨더니 날계란으로 쭈욱 마셨습니다. 누가 옳습니까? 이런 문제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휴 미셸다인의 몸에 밴 어린시절이라는 책을 보면 결혼은 두 사람이 하지만 사실은 네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의 어머니, 아버지와 아내의 아버지, 어머니가 부부의 배후에 있어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부부 생활은 상대방의 기호를 우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방 중심의 가치관을 가질 때에야 타 협과 조화가 이루어 집니다. 부부간에 아직도 누가 옳으냐의 문제로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전혀 성 장이 없는 관계입니다.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 진리 중심의 삶 즉, 성소와 지성소의 삶으로 변 해 가는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의 코스인 것입니다.
복음은 인지도식(shema) 즉, 자기 의식구조 속의 자동적 사고가 진리 안에서 재점검되어 하나님 중심의 구조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숙한 자에게 직면케 하시기 위해서 반대의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아픔을 건드리게 하십니다. 나를 아시면서 왜 이런 어려움을 만나게 하시는지 궁금할 때가 있지만 그것이 바로 나의 극복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뜰을 지나면 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에는 떡상과 금등대와 향단이 있습니다. 떡상은 예수 그리스 도가 말씀과 진리로 공급되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금등대는 빛이 나타나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야 함을 말합니다. 향단은 요한 계시록 5장 8절에 보면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 의 기도들이라 말씀했습니다. 기도, 찬양, 경배,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받는 떡상과 성령의 비췸으로 밝음을 경험하는 금등대와 찬양과 경배와 기 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필요를 충족시켜드리는 향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수가 있 습니까? 이런 세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의 공급과 기도(예배)가 함께 균형을 이루어 야합니다. 이것은 성소의 세 기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공급받는 통로가 다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다른 두 통로도 보완되어야 합니다. 조화를 이루도록 보완해야 합니다. 이 성소는 한마디로 공급 받고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깨끗이 청소된 마음에 일곱 귀신을 데리고 와서 이전보다 더 악해진 사람의 비유를 하셨습 니다. 나를 비워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씻었으면 반드시 채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채 워지는 곳이 성소입니다. 새로운 자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 바로 성전 의 삶입니다. 깨끗이 씻김과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로 채워져서 삶 속에 묻어나야 합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지성소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십니다. 언약궤 속에는 만나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돌비가 있습니다.
첫째, 만나는 그리스도가 나의 만족과 공급이며 행복임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공급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영적 질서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모, 스승, 목자를 존중하고 구역장, 교 구장, 리더를 통해 일하시는 교회의 질서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곳에, 내게 주어진 환경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돌비에는 십계명이 쓰여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원칙을 말하고, 이 것이 날 부르신 목적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성소의 삶이란 그리스도로 공급받고 하나님의 모습으 로 바뀌어서 현재 나의 환경, 목자의 권위를 인정하며 질서를 따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 는 마음으로 지성소를 나와 사람을 섬기는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안되면 자기 주장으로 사 람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을 하게 됩니다. 자기 부인이 이루어질 때 객관적으로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통치권을 주셨습니다. 형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내 모습에서 그리스도가 나오도록 해야합니다. 나를 선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지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가족치유를 공부하다 보면 `가족 경계선`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이것이 유동적인 열린 가정이 있고 닫 힌 사람,즉 폐쇄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을 보면 저의 배경은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서 울타리가 너무 지나치게 열려져 있고 아내는 폐쇄적 울타리를 가진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휴가를 가면 저는 친구 들을 불러서 같이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아내는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아내에게 나는 늘 실속 없는 인간으로 보여졌고, 내가 볼 때 아내는 이기적이고 답답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외식을 해도 누군가 함께 하기를 원하고 내 아내는 우리 식구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옳으냐로 패 권 싸움을 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아픔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장하는 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닌 부모의 양육태도, 자라온 환경의 문제임을 알게되고 서로 양보하게 됨으로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

서로에게 맞추어 줄 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죄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셔서 씻음과 채움을 얻고 하나님 의 검증을 받아 나아가게 하시는 이 세가지의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맞추신 것처럼 내가 섬길 그 대상의 수준이 되어 맞춰주어야 합니다 .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위하여 광야의 삶이 있습니다. 훈련의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원 래 악해서 가만히 놔두면 절로 썩습니다. 절대로 스스로 변화 되는 법은 없습니다.
성막에 나아가기 위해 광야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광야의 훈련이 우 리에게 필요합니다.

결단하고 변화를 위한 훈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 공급받은 후에 섬김과 헌신과 나눔이 있는 제사장 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번에 중국에 다녀왔는데 음력 설날 집에 있는 악신이 나가라고 폭음탄을 터뜨 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리가 너무 커서 마음껏 찬양해도 아무도 못들을 만큼 컸습니다. 극빈자도 한달 월급 만큼의 폭음탄을 사고 부자들은 석달 월급을 사용하여 폭음탄을 산다고 합니다. 이렇게 잡신을 섬 기는 자도 자기의 신념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데 영원하신 하나님, 진리를 경험한 자들이 더욱 헌신해 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씻음과 공급, 하나님의 원칙에 근거한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지불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물질, 정성, 시간들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길 원하십니다.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자가 되십시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