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또 사람은 과연 변하는 것일까?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 등,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성경과 현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되었다. 믿는 사람이 분명 잘 살아야 하고 성경에 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한다고 했는데 믿는 사람이 반드시 잘살지도 않고 믿지만, 변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을 보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잘사는 것이고 무엇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삶인가에 대한 고민도 해보았다.
구약에서 가나안에 대한 동경은 상징적인 의미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는데 가보니까 별로 좋은 땅이 아니었다. 크기도 작고, 오히려 쓸모없는 땅이 많았다. 생색낼만큼 대단한 땅도 아닌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대한 동경을 심으셨을까? 분명 가나안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가나안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출애굽한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등, 가나안에 대한 동경심과 의문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토록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기를 원했던 가나안땅, 그 땅에 대한 그들의 열망처럼 우리 또한 가나안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바라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나안의 삶이 되어야 한다. 목사로서 교인들의 풍성한 삶에 대한 부담감이 많았다.
가나안의 삶은 풍요한 삶이다.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영향력있는 삶을 말한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이 온 목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라고 했다. 사탄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고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사탄은 결코 혼자 망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이 사탄의 수법이다. 망하는 사람은 결코 혼자 망하지 않는다. 망하는 사람과 함께 한 사업도 같이 무너진다. 이것이 멸망의 개념이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 만나기 전보다 삶이 더 풍성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신약시대의 약속이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구원을 얻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70년대 이후에 구원의 문제는 어느 정도 확고해졌다. 그래서 일반성도들도 구원의 확신 문제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에 대한 개념은 이해가 되는데 풍성한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어때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구원얻는 사람들의 삶이 풍요로운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삶을 보기가 어렵다. 풍성한 삶에 대한 모델이 교회에서 제시되어야 하는데 모델이 부족하다.
여기에 대한 깊은 고민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오경을 읽게 하셨다. 백성이 복을 받으려면 지도자가 그만큼 훌륭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그렇게 훌륭한 모세의 지도력에도 그들은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엎드려졌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출3:7-8]“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모세를 부르신 이유가 분명하다. 그것은 애굽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성경적 구원은 영어로 from-to이다. 즉 애굽으로부터 가나안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보장하는 축복의 땅이다. 그 가나안을 얻는 것이 구원이다. 애급땅의 종살이에서 축복의 땅 가나안을 얻는 분명한 분깃점이 있다.
애급의 삶과 가나안의 삶이 다르듯이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이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풍성한 삶이다. 그리고 이 교인의 풍성한 삶을 위해서 목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분명 지도자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안된다는 것을 보게 하셨다. 개인의 지도력은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 망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 40년이 필요한가? 즉 왜 내 삶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가? 내 내면에 있는 문제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잘살아야 한다. 베풀 것이 있고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가나안이 열리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약속을 받고도 왜 못사는가? 구약의 사람과 우리는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원인을 알고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
Ⅰ. 적들의 문제가 아니다.
[수5:1]“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백성들의 소식을 듣고 싸우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말하자면 가나안을 성취하는 일에 있어서는 적이 강해서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적들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두 정탐군이 탐지하러 갔을 때 두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 기생 라합을 준비하셨다.
[ 수2:8-11]“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
우리가 게임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 팀에 미리 겁을 먹고 경기를 못하더라. 그런 이야기이다. 거기다가 우리팀을 이롭게 할 첩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적들이 강해서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6장을 보면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데 이것 역시 전쟁이 아니다. 거의 게임과 같다. 7장에 실패한 이유는 십일조 헌금을 떼어먹은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다. 패배의 원인이 되는 아간의 죄를 처단하고 전쟁했더니 이겼다. 이것을 보면 전쟁이 아니라 전쟁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쉬운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광야 40년을 살다가 죽었다면 왜 그런 것일까? 다시 말해 가나안 전쟁은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 짜고 싸우는 싸움이다. 그런데 그 게임에 졌다면 이상 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싸우려고 가는 대상은 누구인가? 가나안 7족속이다. 우리의 대적은 누구인가? 악한 영들, 환경이다. 정탐꾼의 보고는 가나안 7곱 족속이 너무 강해서 이길 수 없다고 했지만, 성경은 그들의 간담이 녹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우리가 대적을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우리가 정복해야 할 가나안은 우리의 사업, 가정, 건강의 문제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약속이 안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적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내면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가나안의 정복전쟁에서 승패의 원인을 파악해 봐야 한다. 6장의 여리고성의 승리 이전에 이미 1장에서 5장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수1장: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1:8]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마음을 지켜라. 말씀에 마음을 비끌어 매라. 그러면 네 길이 평탄할 것이다. 네가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전쟁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리더십도 필요하지만, 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수2장: 구원은, 살길은 귀에 있었다. 라합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식을 듣고 정탐꿈을 잘 예우하여 붉은 줄을 드리움으로 살게 되었다. 비천한 한 여인이 생명의 메시지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을 선택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다른 사람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은 항상 내가 들어야 한다. 여리고 사람들이 다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살길을 얻지 못한다. 그런데 라합은 그 말씀에 응답하여 살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게 주어진 현재의 말씀을 구원의 메시지로 들어야 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만약 하나의 소식으로 들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수3장: 언약궤를 맨 제사장을 따르라. 광야 40년동안 모세가 인도했다. 그만큼 지금까지는 탁월한 지도자, 모세 개인의 리더십이 중요했다. 그러나 요단을 건널 때에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을 따르라고 하신다. 이 때 언급한 제사장들은 이름도 없다. 이것은 개인의 메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너희에게 언약을 보여주는 제사장을 따라가라. 그러므로 리더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고, 선포해야 한다. 비전을 심어주는 리더를 붙잡아야 한다.
수4장:요단강을 건너라. 광야1세대는 홍해를 건넜다. 2세대는 요단강을 건넜다. 신약에서 강을 건너는 것을 세례에 비유했다. 세례는 죽음을 상징한다. 즉, 세례는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옛사람의 죽은 옛습관,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가나안이 열린다.
수5장: 할례를 행하라. 유월절을 지키라.
수6장: 여리고성을 7바퀴를 돌아라. 군사력으로 싸우지 않았다. 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이 이긴 것은 그들의 실력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기도록 해놓고 싸우게 하신 싸움이다.
가나안의 정복이 단계별로 어떻게 정복되는지 보아야 한다. 이처럼 우리 가정에 멋진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를 다 해놓으셨다. 그런데 결정적인 끈을 풀지 못하고 죽는다. 코 앞에 와 놓고 마지막 작업을 못해서 폐배한다. 그러므로 6장 전에 5장을 잘 봐야 한다. 우리 신앙에서도 파이날 코스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이 문제가 아니다. 적과의 전쟁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내 자신의 내면의 문제이고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이것이 1-5장까지의 문제이다.
Ⅱ. 전력이나 전략의 문제가 아니다.
[수5:8]“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전쟁에 나가야 할 사람들을 할례를 행한다? 적들이 알면 다 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행하게 하시는가? 가령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면 사업구상을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사람을 쓰는 문제며 자금, 아이템구상, 등 연구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신다. 더 쉽게 이해를 하자면 우리 교회가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 전에 장기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처럼 교회의 재정 상태가 너무 어려워서 아무런 계획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여러 교인들이 한 목소리로 교회 건축을 이야기 했다. 그래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아무 준비도 없는 우리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의 수고를 안다. 진리를 향한 열정과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을 안다. 교회 건축을 준비하라.” 그래서 우리를 비웃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쥐뿔도 없는 것들이 땅을 보려 다녔다. 아무 준비도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셔서 건축을 하게 했다.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것은 먼저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생명샘교회는 말씀훈련을 해왔다. 일꾼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질적인 요소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자격을 갖추는 일에 훈련을 해왔다. 그 준비에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의 순서를 거꾸로 했다면 안주셨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는 계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을 살펴야 한다. 이처럼 가나안정복은 세상의 논리와는 선후가 달랐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의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한다. 사업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 우리가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왜 안풀리느냐? 전략의 문제도 아니고 힘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 할례를 받으라고 하신다. 촌음을 아껴서 훈련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말이 아니다. 왜 40년씩이나 걸렸는가? 우리가 보이는 것은 잘한다. 남의 문제를 충고하고 비난하고 그것은 잘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잘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리더를 따라가려고 한다. 이것은 종교이다. 기독교는 내가 각색한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신앙의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청종의 문제, 따르는 것의 문제이다.
[수5:4-6]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할례의 의미-하나님 말씀 앞에 복종하는 것이다. 주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들이 광야의 기적을 보고도 망한 이유는 약속을 믿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Ⅲ 주권의 문제였다.
주권은 누가 주인인가에 있다. 내가 주인이냐 하나님이 주인이냐, 누가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가느냐의 문제이다.
길갈의 의미- 애굽의 수치를 굴러 보내라
애굽의 수치가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다. 애굽에서의 노예의 삶의 방식을 수치로 알고 굴러보내라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인간행동의 원인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인간결정론이라고 한다.
1. 유전적 자아.-생물학적 결정론-DNA, 유전자가 결정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집안은 음악적 재는이 없다 그러므로 내 안에 음악을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믿고 산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물학적인 결정론이 말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산다. 일본 사람은 원래 적었다. 그런데 우리 보다 크다. 왜 그런가? 잘먹고 커졌다. 키가 작은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잘먹어서 유전자를 변화시킬 수있다.
한 집사는 가계도를 그리다가 집안에 암으로 죽은 사람이 5명이나 있음을 발견했다. 그 후에 조금만 이상해지면 혹시 내가 암이 아닌가 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스트레스는 암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는 결국 스트레스에 의해 암이 발병했다.
상반계급이 있을 때 양반은 양반이고 상놈은 상놈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그러나 지금은 상반이 없어졌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생물학적 결정론을 따른다. 그러나 복음은 더 큰 곳에 있다. 바로 그리스도는 아담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실고 오셨다.
2.심리적 자아 -정서적 결정론-우리 부모가 나를 어떻게 길렀느냐에 따라, 즉 부모의 양육패턴이 나를 결정한다고 믿는 것이다.
-내 어머니는 늘 바빳다. 그래서 나는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외롭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정다감한 남편이 옆에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외롭다.
-내 아버지는 나를 주먹으로 다스렸. 즉 강압구조 키웠다. 그래서 내 안에 분노가 많다.
-내 부모는 내가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다. 과보호이다. 그래서 나는 내 맘대로 안하면 화를 낸다.
이렇게 정서적 결정론 부모가 나를 결정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지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결정론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인 아픔을 평생 붙들고 산다. 나는 그런 사람이야. 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예화)어릴 때 가정불화로 자주 가출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한 자매가 있었다. 어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늘 불안하고 잠을 자지 못하면서 자랐다. 그녀가 자라고 나서 그녀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증세가 있었다. 성인이 되어도 이성을 사귀지 못한다. 사귀게 되면 너무 집착해서 상대가 조금만 관심을 덜 보여도 너도 나를 떠나려고 하지. 하고 상대를 묶으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깨어진다. 나이가 마흔이 넘었어도 결혼을 하지 못하고 늘 외로워한다. 어머니와의 친밀감 형성이 되지 못하여 사람을 신뢰하지 모사고 사랑할 수가 없는 상황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뚫고 들어가지 못한 아픔의 상황이다.
3. 환경적 자아-사회적 결정론-내가 살아온 환경이 나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내가 수학을 못하는 것은 그 때 수학 선생을 잘 못 만났기 때문이다. 친구를 잘못만나 이렇게 되었다. 그 때 나의 상사는 늘 직장에서 나를 힘들게 했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 적응을 못한다. 등, 우리가 경험했던 여러 상황들이 나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옛 사람을 벗으라고 했다.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이 오셔도 도와주실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능력은 그것을 바꿀 수 있다.
4.폐배적 자아-가계결정론- 조상들 속에 있던 악한 영들이 내게 전이되었다. 귀신이 나를 불행하게 하고 있다. 나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 내 존재 안에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결정되어 있는 영역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을 풀려면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화)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친구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친구의 죽음에 심한 충격을 받고 슬퍼하며 울었다. 그런데 그 후에 자신의 내면에 우울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울이 심하여 심지어 직장생활도 못하고 결혼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말 철야시간에 뜨겁게 기도하는 중에 축사가 이루어 졌다. 우울의 영이 자기 에게 들어온 것을 보게 되었다. 매사에 꼬아서 내가 너를 망하게 하려고 들어왔다고 하는 귀신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몇차례 축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에 온전히 자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믿는 자에게 귀신이 들어올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정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쫒아낼 수 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도 내가 끊을 수 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5. 신앙적 자아-구속사적 선택의지론
하나님이 나를 지으시고 이끄신다. 하나님이 내게 천국열쇠를 주셨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야 나는 할 수 있다. 하나님도 나를 통해서만 일을 이루신다.
왜 이스라엘을 홍해로 이끄시고 요단으로 이끄시고 할례를 행하게 하시는가? 애굽의 잡동사니, 광야의 수치를 청산하고자 하심이다. 내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변화되기 위해서는 훈련해야 한다. 내가 싸워야 한다. 내게 통치권을 주셨다. 내가 천국열쇠를 가지고 내가 여는 것이다. 성령님이 오셔서 그것을 도와주시는 것이다.
[딛전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그날 당장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심전력해서 노력해야 한다. 행동의 변화, 습관의 변화는 의식하지 않으면 안바뀐다. 할례받아야 한다. 우리는 내면에 있는 옛사람의 말을 잘 듣는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는다. 그래서 잘라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데미안에서 헷세는 이렇게 말했다. “새는 알을 깨고 태어난다. 한 세계가 태어나려면 한 세계가 깨어져야 한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엄청난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죽었다. 왜 그런가? 영적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영적으로 신령하게 되려고 하면 나의 것을 잘라버려야 한다.
우리의 미래에 가나안이 열리게 되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훈련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