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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7:1-10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움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 이제는 인성이 아니라 신성을 회복하라!
1. 이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2-3절
이 백부장은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그를 위해 유대 장로 몇 사람에게 부탁해 예수님이 오셔서 그의 종을 구해 주기를 간청했다. 그 당시의 ‘종’의 개념은 헬) 둘로스(δουλος)라고 하는데, 종은 어떤 결정권도 자기에게 없고 전적으로 주인의 뜻에 맡겨진 존재이다. 백부장은 엄청난 신분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엔티모스(ἔντιμος)’, 그 종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았고 사랑했다. 그러나 이방인 백부장이 유대 장로에게 부탁하고, 유대 장로들이 이방인 백부장의 부탁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간다는 것은 그 당시 종교 문화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은 부정하다고 해서 이방인을 향해 손을 내밀지 않았고 사람처럼 여기지도 않았다. 상종도 안했다. 교만하고 배타적인 유대 장로들이 백부장의 부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모든 종교적 대립을 초월할 정도로 백부장이 유대민족을 사랑했다는 의미이다. 백부장은 또 자기 재산으로 회당을 지어 주었다고 했다.
백부장이 유대장로들에게 청해 예수님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부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자신의 종을 구원하여 소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라면 오셔서 구하실 것을 신뢰한 것이다. 그럼 정복자의 백부장이고 권력자로서 자기가 직접 간청을 하지 왜 장로들에게 부탁을 했을까? 그것은 자기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자라는 겸손의 표현이다. 통치자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유대인 중심으로 두고, 스스로 나갈 수 없는 신분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유대의 법으로 스스로를 이방인과 죄인으로 낮추어서 예수님을 높이 보고 있다. 그런 까닭에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유대의 율법상 예수님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하면 부정한 행위가 되어서 곤란하게 되고 큰 소요가 일어날 것을 알았던 것이다. 백부장, 이 사람은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시면 감당이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2. 백부장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7-8절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확신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원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똑같은 능력으로 인정하고 신으로 대접한 것이다. 중풍병자를 낫게 하기 위해 친구들이 침상 째 들고 온 것도 그들의 믿음이 친구를 살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만 하면 낫겠다고 한다. 신적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못할 일은 없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3. 내가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9절
백부장은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과 백부장은 실제로 만나지도 않았다. 만난 적도 없는데, 예수님이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행함을 보고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유발하는 행함이 있었기에 믿음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믿는다,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 때문에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믿음은 결국 나타나야 한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2:22)
*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믿는 대상이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