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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7:11-17 “나인성의 과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43:19)
1. 예수님은 (나인성)에서 무엇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시는가? 11-13절
‘나인’의 뜻은 ‘기쁘다, 즐겁다,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지금 그 성에는 그 성의 의미와는 달리 과부의 독자인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슬프고, 힘들고, 어둡다. 한 여자가 남편을 잃은 것도 그 시대에 있어서는 큰 고통인데, 유일한 희망이고 의지의 대상이었던 아들까지 죽은 것이다. 그런 슬픔 속에서 장례행렬은 성 밖으로 나오고, 예수님과 일행은 지금 성 안으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서로 “딱” 만난다. 당시 유대 장례문화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당일 날 장례를 치른다. 예수님은 그 시간을 맞추어 제자들과 무리들을 데리고 40km를 걸어가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형용할 수 없는 그 과부의 슬픔을 불쌍히 여기사 그의 인생에 가장 큰 고통을 해결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인이요 하나님이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 청년의 죽음의 행렬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슬픔의 행렬이 기쁨의 행렬이 되었다. 아무리 인간의 절망이 크고 고통과 슬픔, 외로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만나는 날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날이다.
2. 그것은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13절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를 향하여 ‘울지 말라’고 하신 것은 ‘내가 너의 슬픔을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이적을 행하실 때 그 모든 사역의 원동력은 불쌍히 여기심이었다(마14:14, 15:32, 20:34). 불쌍히 여기셨기에 성육신하셨고, 찾아오신다. ‘불쌍히 여기다’는 ‘(헬)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라고 하는데,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 즉 대상을 보고 그 처지의 어려움이 창자까지 뒤틀리는 것처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과부의 슬픔으로 속 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무 불쌍한 인생의 처지를 돌아보고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하신다. 나인성 과부를 통해서 죄 많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보다 앞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신 그 하나님 은혜가 크기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생명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이다.
3. 나인성 과부의 사건을 본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16-17절
나인성의 과부는 즉시로 복음의 수혜를 입었다. 과부는 울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이 그 모든 슬픔을 해결해 주셨다. 복음의 수혜를 입은 이 과부는 믿음이 생겼을까? 생긴 것이다. 기쁨이 너무 크다면 지금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할 수 있을까? 그 기쁨으로 인해 원수가 아닌 누구라도 사랑할 것이고, 빚진 자가 와도 탕감해 줄 것이다. 그 무엇보다 귀한 아들을 다시 얻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수혜는 이런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 예수님의 제자는 이런 것이다. 복음의 수혜자가 되면 예수님이 교훈하신 것을 해라 하지 말라가 아니라, 저절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뭐라도 해 주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비판하는가 아닌가로 믿음이 있나 없나를 판단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행동을 하면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복음의 수혜자가 되면 그런 행동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