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예수님 다시 말씀하시기를

김병진 목사 / 눅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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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1-9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시기를

 

왜 예수님은 회개라는 주제를 다루고 말씀할까요? 우리가 여전히 열매 맺지 못하고 빛으로, 청지기로 살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여전히 열매 맺지 못하고 남을 비난하고 나는 괜찮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사건입니다. 1

그 당시 문화는 피정복자들이 정복자의 신을 섬기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들의 종교 의식에 걸림돌이 되거나 그들의 통치를 따르지 않거나, 로마의 신을 섬기지 않으면 학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함께 하는 사람들과 제자들이 그 성전에서 희생당한 갈릴리 사람들은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많아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기에 바르게 고쳐 주려 합니다. 사람이 병들고 재난 등으로 죽는 것이 죄가 있어서 죽고, 살아 있는 우리는 죄가 없어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는 그나 너나 다 지금 죽어도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사람들이 죄를 짓고 고백하면 용서 하신다고 하니 문제만 나열하듯이 죄목을 고백하고 나는 이제 용서 받았고, 더 이상 아무런 문제없다고 정당화하고 합리화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합니다. 이것이 본질적 회개일까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가 단지 윤리적으로 내가 누구 누구를 시기 했습니다, 미워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도적질 했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세요. 단지 이렇게 고백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윤리적 회개로 자기 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 해 버리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하나님 저는 정말 죄인이고 오직 십자가의 보혈만이 나를 용서하십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가 필요합니다. 회개 하는 것은 많은 심적 아픔이 따릅니다. 죄를 멀리 하려하고 그 죄 때문에 십자가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기에 아파하는 것입니다. 윤리적 회개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 할 수도 없고 열매를 맺고 싶어도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본질적 회개가 이루어지면 크든 작든 계속 열매가 나타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벧전1:18-19).

 

2. 예수님이 기다려 주는데도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은 자들에게 포도원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6

한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얻을까 해서 왔는데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말하되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했으니 찍어 버리자 땅만 버리겠다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고,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고,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이고, 열매는 존재적 회개 본질적 회개입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도 그대로 두시면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합니다.

*‘파다의 스캅토(/σκάψω)는 뿌리 주변에 흙을 부드럽게 해주고 그 뿌리가 뻗어 가도록 거름 주는 일을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3년을 스캅토 했는데도 더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정성을 쏟으므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아직 재림이 아니니까 더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보고, 다른 제자들도 하고 종들을 보내서라도 더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는 신적 인내와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이고 사랑이고 중보의 모습입니다(딤전2:5).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도록 스캅토 해 줄 수 있지만 열매 맺는 것은 반드시 나무가 하는 것입니다.

 

3. (무화과나무)가 다시 열매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살다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있고, 육체적으로 건강이 안 좋을 때도 있고, 관계적으로 정서적으로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돈이 없어서 좌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에 좌절하고 향방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합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가족과 이웃과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첫 단추는 저는 상식이라고 봅니다. 상식이 있어야지 상식 밖에 행동을 하면 아무리 소망을 말해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을 잡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먼저 신뢰를 회복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의 메시지를 던졌을 때 희망을 보고 소망 이신 하나님을 바라 볼 것입니다(벧전 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