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한번 전과가 있는 사람이 재범해서 돌아오는 재범률이 64.3%라고 한다. 자유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대변해 주는 퍼센트이다. 결심하고 결단해도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는 강력하게 제어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란 외적인 자유만이 아닌 내적인 자유이다. 겉이 변했다고 해서 속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 사람의 변화는 내면, 중심, 영혼의 변화에 있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바른 개념
1)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 욕망을 따라 행하는 자유이다. 모든 동물계의 기본 욕망이다.
2)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자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다음 일을 위해서 아침에 일어나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숙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자유이다.
오늘 본문은 아들과 종의 차이를 이야기 하고 있다.
Ⅰ. 34-35 죄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죄를 범하면 종이 된다는 것은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법의 제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자유는 대단히 소중하지만, 자유에 제한이 없으면 방종하게 된다.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브레이크이다. 모든 기능이 다 좋아도 제동장치의 기능을 잃어버렸다면 사고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리미팅 시스템이라고 한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제한이 있어야 한다. 가령,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는 자유가 있어도 나가게 되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생명을 잃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란 원칙이 있고 제한이 있는 규범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하는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만약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면 상대방을 헤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타인을 헤치면 결국 나를 헤치게 된다.
얼마 전, 베스트셀러였던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인공은 자유와 방종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최종적으로 자유를 선택한 한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40이 넘은 한 중년 여성이 어느 날 자신을 알아주는 사진사와 사랑에 빠진다. 비록 나흘간의 사랑이었지만, 생애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고 할 만큼 뜨거웠다. 그 때 남자가 자기를 따라 가서 살자고 했을 때, 여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는 당신을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만약 내가 당신을 따라가게 된다면 언젠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남편과 자녀들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고액과외를 하는 대학생들이 졸업 후에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잘 못한다고 한다. 적은 노력으로 많은 대가를 받던 습관을 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돈을 버는 습관은 근면한 생활습관을 잃는 일이 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다. 오늘 날 무엇이든지 힘으로 해결하려는 습관 또한 위험한 일이다. 주먹이나 법으로만 다스려지는 사람이 된다면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하더라고 아들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내가 해야 하고 하고 싶어서 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그리고 제한된 자유는 자기를 지키는 것이다.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자유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Ⅱ. 자유는 주권이요 선택이다.
[35-36]“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두 아들이 있다. 참아들 예수님이 계시고, 그 아들로 인해 자유케 된 우리이다. 아들은 집, 곧 기업과 상관이 있다. 종은 어디를 가나 피해의식으로 사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자기 일을 하는데 기쁨으로 하지 못하고 짜증으로 하는 사람은 종이다.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천직으로 하고 기쁨으로 하는 사람은 아들로 사는 사람이다. 교회 일도 기뻐서 하는 사람이 있다.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힘이 난다. 종은 집에 거하지 못한다는 말은 기업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들로 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 아들이신 예수님을 모델로 살아야 한다.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냐보다 은혜를 은혜로 받아야 한다.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면 바울보다 가롯유다가 더 많이 받았다. 그런데 바울의 선택과 가롯유다의 선택은 달랐다. 은혜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바울도 되고 가롯유다도 될 수 있다. 종이냐 아들이냐는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행 불행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변화해야 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주권의식을 가지고 선택해야 한다.
루즈벨트는 “아무도 당신의 동의 없이 당신에게 고통을 가하지 못한다.”
간디는 “우리가 주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우리의 자존을 빼앗을 수 없다.” 고 했다. 일어난 사건자체보다 사건을 해석하고 응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환경에 인생이 좌우된다면 불안한 인생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환경을 우리가 선택하고 하나님을 대행해서 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좋은 날들을 만들 수 있다. 삶에 대한 태도가 인생을 결정한다.
1962년 빅터와 밀드리오 괴르첼 두 사람이 성공한 사람 413명을 선정해서 행적과 전기, 업적들을 수년간 연구했다. 그 결과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연구대상 중 392명이 역경을 극복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절망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빅터와 밀드리드 괴르첼은 연구보고서에 결론으로 ‘고난은 장애물이 아니라 기회였다.’라고 적고 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4가지로 반응을 한다고 했다.
1)과거로 돌아간다. -과거로의 도피 2)미래에 대한 공상에 빠진다.-현실도피 3)몸을 옴츠리고 누군가 도와주기를 기다린다. 4)위기에 맞서 위기를 유용한 것으로 바꾼다.
이 땅에 살면서 어려운 환경에 들어갔을 때 내가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위의 4가지 선택 중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진다.
좋은 조건을 주었어도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평생 불행하게 된다. 불행한 일이 많아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에 대처하는 태도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것이다. 광야와 같은 종의 세월을 산다고 해도 아들의 삶을 살아서 위기를 유용하게 바꿀 수 있어야 아들이다.
Ⅲ. 31-32 진리가 중심에 설 때 자유한다.
[31-32]“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언제나 중요한 것은 말씀이다. 새로운 말씀에 가하라. 진정한 자유는 진리가 중심에 설 때 주어진다. 문제는 내 중심에 진리, 참이 있느냐하는 것이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된다고 했다.
사람의 만남은 언어로 되어 진다. 언어를 통해서 뜻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언어적 관계이다. 그 분이 하신 말씀이 내게 거하지 않으면 종으로 살 수 밖에 없다. 잘못된 부모의 말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새말을 들어야 한다. 습관화된 부정적인 의식과 하나님의 말씀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충동, 감정이 아니라, 원칙이 있는 사람은 삶의 바른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충동을 누르고 원칙을 붙잡는다.
1) 목적 없이 사람 많이 있다.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사람. 뭔가 성취한 것 같지만,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허전하다. 나는 방향과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았는가? 목적이 없을 때 여러 다른 것들이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그 중 하나가 상처이다.
한 형제가 한 자매를 사랑했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이 계속 올라왔다. 아버지에게 구타당하는 어머니를 보호해 주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억눌림이 있어서 자매를 사랑하면서 자신이 없다. 이것이 마음의 상처이다. 어떤 사람은 분노를 따라 살고, 어떤 사람은 두려움에 지배를 받는다. 어떤 사람은 소유를 위해 살다가 방황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다 욕구에 끌려 사는 삶이며 상처에 이끌려 사는 삶이다.
이제 우리는 신적인 개입으로 새로운 신분을 얻었다. 그러나 신분이 바뀌었어도 내면에서 아들을 사는 것은 내 선택에 있다. 아들의 삶은 충동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사는 삶이다.
2)목적은 있지만, 자율적이 못한 경우이다.-목적을 세운 근거를 부모의 강요에 의해 혹은 이 시대와 사회가 준 가치에 의해 결정한 사람이다.
대학생 중에는 대학을 목적으로 왔지만, 자율적이지 못하고 부모의 강요에 의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막상 목적을 이루어도 그 가치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 가난하게 산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목적을 세우기 쉽다. 이런 목적을 가진 사람은 그 목적을 이룰 가능성도 크다. 문제는 목표를 이룬 다음에 진정한 기쁨이나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면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된다. 목적이 무엇을 기준한 목적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고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를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셨음을 알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꼭 해야할 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어도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이유를 발견한다.
[사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 내가 너를 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 기억되는 바가 된다. 하나님께서 나의 예배를 기다리신다는 의식이 있다. 몇백명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과 일대 일의 관계 속에서 나를 기억하시고 아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우리 속에는 열등감이 있고 상처가 있다. 시대가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 있다. 그러나 이제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우리에게 있다. 상처없는 사람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망과 진리 사이에서 상충해서 싸운다. 상처나 과거에 대한 환경이 주는 것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서 새 사명의식에 붙잡혀야 한다. 내가 살아온 잘못된 가치관을 진리인양 붙잡고 사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옛날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있다. 주님은 내 말을 너희가 기억하고 결단해서 살면 참된 자유가 있다고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