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룬 공동체가 바로 예루살렘 신앙공동체이다. 세계를 변화시킨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보잘 것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공동체가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공동체로 변화되었는가?
사도행전 1장에서의 무기력했던 그들의 모습은 2장에서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강림사건에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교회의 능력을 경험하려고 할 때 초대교회가 성령강림이 있기까지의 경로를 보아야 한다.
Ⅰ. 이 공동체는 기도로 충만한, 준비된 공동체였다.
. [행1:13-14]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
예수님의 열 한 제자, 그리고 120명의 성도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의 오심을 위해서 전적으로 기도했다. 오늘 날에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성령님의 오심을 위해서 전적으로 기도하는 일이다. 유대인들의 기도는 찬양과 함께 통성으로 하는 기도였다. 그들은 모여서 이렇게 찬양섞인 기도를 하며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렸다. 성령님은 기도로 준비된 공동체 속에 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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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이 공동체는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공동체였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말씀을 공부하는 교회였다. 하나님은 깨달음으로 준비된 공동체에서 역사하신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식과 같은 진리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의 첫 번째는 성도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것이다. 응답을 주시되 하나님의 때에 주신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여 주신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에 모인 이 공동체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그들이 기도한대로 하나님의 때에 오셨다. 그리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임하신다. 두 번째 공식은 아는 것이 힘이라는 진리이다. 우리가 모를 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첫째로, 정확한 것을 모르면 착각을 하게 된다. 모르면 또 나타나는 증세가 있는데 그것은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는 착각은 별 문제가 없지만, 진리를 몰라서 하는 착각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을 알아야 하고 체험해야 바른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다.
Ⅲ. 이 공동체는 열심히 모이는 공동체였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매일 모이기를 힘쓴 공동체였다. 공동체의 특징은 함께 하는데 있다. 모든 공동체는 모임으로 힘을 얻는다. 모임이 중요한 것은 모일 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함께 할 때 함께 은혜를 받는다. 성도가 함께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힘을 얻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참기름집에 자주 가면 몸에 참기름냄새가 베이고 향수집에 자주 가면 몸에 향수가 베이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가 많은 곳에 가면 성령충만을 입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는 모임에 자주 가는 것이 성령충만을 받는 비결이다.
Ⅳ. 이 공동체는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공동체였다.
열 두 제자 중에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 공동체는 가롯 유다의 자리를 채워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도록 빈자리를 메꾸고 있다. 이처럼 오늘 우리도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무너진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일이다. 그리고 빈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를 다시 채워야 한다. 그리할 때 성령충만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Ⅴ. 이 공동체는 무엇보다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는 공동체였다.
[행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들은 그 약속을 따라 지금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성령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뜨겁게 준비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 많은 교회가 있지만, 크게 나누어서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성령충만한 교회이고, 하나는 성령이 메마른 교회이다. 교회도, 개인도 성령충만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불가능하다. 긴 역사를 자랑하지만, 무기력한 구라파 교회처럼 성령충만이 없는 신앙생활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충만할 수 있는가?
성령에 대한 오해가 있다. 그것은 성령을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고 비인격적인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님을 인격으로 알지 않기 때문에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 그 결과 신앙이 메마르고 영적으로 쇄퇴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적으로 흥왕하고 부흥하는 교회는 성령을 사모하는 교회이다.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였고 지금도 부흥하는 교회는 영적으로 열려있는 교회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내 의지로 성령을 향해서 맘을 닫아버리면 억지로 들어오시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이 임하시기를 사모할 때 우리 가운데 오셔서 뜨겁게 역사하신다. 성령을 향한 간절함 위에 새로운 기름부음으로, 불로 임하셨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늘 새롭게 성령으로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은 단 한번의 채워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2장에서 충만했던 성령충만은 4장에서 다시 채워진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행 4:31] “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통성기도를 하고 났더니 성령이 얼마나 크게 임하셨는지 실제로 물리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성령이 임하실 때 육체도 영혼도 진동을 했다. 혀도 진동을 해서 방언을 하게 되었고, 심지어 땅마저 흔들리는 진동을 했다. 교회는 이런 끊임없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리고 연속적인 성령충만함의 역사가 이루어 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동안 하신 일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복음전파를 하셨다. 하나님이 직접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전파하셨다. 둘째, 여러 지역에 다니시면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쫒아내며, 가난한 자, 눌린자에게 자유를 선포하포하심으로 그들을 섬겼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나를 구현하셨다.
모든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이 무너지면 삶을 포기한다. 모든 사람에게 꿈이 있다. 예수님에게도 꿈이 있었다. 예수님의 꿈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꿈은 동시에 하나님의 소원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 죄악과 고통과 탄식이 있는 이 땅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 천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평화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꿈, 하나님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그 후에 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위에 구현하는 것은 예수님의 최대의 꿈이다. 우리의 꿈도 예수님의 꿈 안에 있다. 하나님나라의 구현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 처럼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실천하셨던 사랑을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