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사랑의 길(愛道)

신문궤 목사 / 아5:1-8

dot01.png

본문

아가서는 대화체로 된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처럼 보여 진다. 그러나 이 아가서를 단순히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되는 그리스도인 간의 사랑이야기로 해석하기 때문에 성경에 들어 있다. 여기서 남자는 예수님이시고 여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다. 특히 아가서 5장은 무심한 여인을 애타게 사랑하다가 떠나버린 남자와 뒤늦게 그 남자의 사랑을 깨닫게 된 여자가 애타게 자기의 연인을 찾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연인이신 예수님과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본문은 우리가 예수님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도록 하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Ⅰ. 사랑하는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계속 맺기 원한다면 상대방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
본문 1절은 남녀의 결혼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1절에서 남자가 여자를 부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라고 한다. 이것은 남자의 감미로운 사랑의 속삭임이다. 또 깊은 남녀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이다.
동산에 들어간다. 라는 말은 여자는 전적으로 남자의 것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님은 우리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신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물이다.
결혼생활은 연애시절과 사뭇 다르다. 신혼여행과 달리 결혼은 사실세계이다. 이러한 결혼생활에서 남녀가 계속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호간에 노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그리스도인들이 처음 믿을 때는 많은 시간 을 주님을 위해서 할애하여 바친다. 그러나 나중에는 예수님께만 집중하는 하여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이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하여 점점 무관심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본문의 여자는 남자에게 대해서 무관심으로 가득차 있다. 일터에서 돌아온 남자를 문밖에 세워두고 여자는 잠자리에 누웠다. 남자는 간곡히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여자는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 결단코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 여자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본문의 남자는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을 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요청하고 계신다.
2절 하반절에서 남자의 모습은 처량하기 까지 하다. 남자는 급기야 눈물을 머금고 사정사정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계속 계속 문에 노크를 퍼붓고 있다. 그만 시간은 흘러서 문 앞에서 밤을 지세웠다.
남자의 사랑은 인내심으로 가득차 있다. 대단한 인내의 사람이다. 고전13장에서 사랑은 오래참고...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 남자를 두고 한 말씀인듯 하다.
이것은 우리 각 자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 마음문 앞에 서서 우리의 마음문을 두르리시고 계신다. 인내심을 담뿍지니고서 그렇게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심도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 이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심각하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고 계신다. 이 시간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이 있다. 그것은 열린 마음, 개방된 마음이다. 주님은 우리의 폐쇄된 마음, 좁은 마음 고집센 마음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한가? 본문 여자의 마음은 아닌지 묻고 계신다.
2절 후반절에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라고 부르고 있다. 이 남자는 여자를 지극히 사랑한다. 예수님도 우리 각자를 향하여 오 그대는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여 나의 사랑을 받으라고 고백하고 계신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누이, 한 형제이다. 더 나아가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다. 이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2)비둘기-평안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3)완전한자-우리를 보실 때 완벽한 자 흠이 없는 자로 보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마음 문 앞에 계신다.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씀은 대단한 칭찬의 말씀이다. 우리가 사실 칭찬받을 것이 별로 없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칭찬하고 있다. 나에게는 그대가 나의 아름다운 신부이다. 한 가족이고 형제이다. 나에게는 완전한 자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사랑의 고백이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왕같은 존재이다.”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하여 당당하게 서야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런 존재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이만큼 사랑하신다. 이 세상에 이와 같은 사랑이 있겠는가? 이 세상에 이런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남자의 사랑이 이같이 강력하고 정열적이지만, 여자는 엄청난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3절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이처럼 문밖에 있는 남자에게 여자는 지나치게 무관심하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형편만 고려한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계속 맺기 원한다면 상대방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 영적으로도 우리 주님과 좋은 관계, 원만한 관계, 올바른 관계, 성숙한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과감하게 탈피해야 한다.
처음에 여자는 자신의 불편함에만 도취되어 있었다. 그런데 뭔가를 놓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자는 돌연히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고 만다.
5절에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자기 자신만 바라보고 있던 이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문밖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던 나머지 황급히 일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문을 열었건만 사랑하는 남자는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Ⅱ. 사랑의 기다림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남자는 계속해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도 계속해서 기다려 주지 않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6/ “내가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우리가 예수님께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본문의 남자처럼 떠나실 수 있다. 보다시피 드디어 여자가 문을 활짝 열었을 때 여자는 적어도 두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틀림없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문앞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게 되었다. 왜냐하면 문빗장에서 남자의 몰약즙이 아직도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몰약은 문앞에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몰약은 사실 예수님에 관한 상징이다. 몰약은 남자의 향기이다. 몰약은 종국적으로 고난과 아픔을 상징한다.
본문의 남자는 밤을 지세며 사랑의 크나큰 아픔을 체험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아파하시는 주님이 되셨다. 따라서 몰약은 고난과 아픔을 말한다. 참사랑은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2)여자가 문을 열었을 때 사랑하는 남자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지 않으신다. 어느 때까지만,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가까이 계실 때 만날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지연하면 기회를 놓치게 된다 우울 주물하다가 기회를 깡그리 잃어버리게 된다. 예수님에 대한 무관심의 유혹이 주님을 만날 기회를 삼켜 버린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버린 것을 깨닫자 마자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떠나버린 님을 찾기란 여간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산더미같은 인내를 감내해야 한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가? 계속해서 기다리며 기도해야 한다. 부르짖고 부르짖어야 한다.

Ⅲ. 사랑을 되찾는 데는 많은 대가와 협력을 구해야 한다.
갑자기 떠나간 님을 찾게 되었을 때 여자는 많은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7절에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는구나.” 세상에서 여자가 당하는 일 중에 이보다 더 큰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여자가 남자를 만나려고 할 때 그 앞에 험준한 산이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탄은 우리가 예수님과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시작할 때 마귀는 반대하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상황이 우리를 걸고 넘어지게 한다. 때로는 부모, 친척, 남편, 아내, 직장, 욕구, 돈, 친구, 요즘은 인터넷, 더 나아가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 때로는 우리를 걸고넘어진다. 잘 믿으면 믿을수록 반대적 상황을 만나게 된다.
마음 졸이며 눈물을 머금고 떠난 님을 찾아 나선 여자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8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사실 예루살렘 여자들도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예루살렘 여자는 이교도가 아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각자는 결코 교회 안의 사람과 무관하지 않다. 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 혼자 나아가는 것 같아도 실상은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나의 사랑하는 자를 지극히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그렇게 전해달라고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요청했다. 정말 여자는 심각한 사랑병에 걸려 있다.
묘약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헤어진 님과 다시 만나는 것이다. 생명샘교회가 예수님 때문에 병나는 교회,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랑병에 걸리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인해 예수님 때문에 병걸리는 그것에 있다. 그 병은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사랑병이다. 예수님만 사랑하는 병은 성숙한 신앙으로 가는 힘이요 원동력이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연유된 사랑병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르고 성숙된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인도하는 길이다.
이 길은 사랑병이라는 길이다. 이 길은 예수님 때문에 미친 사람들만 가는 길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길에서 언제나 현존하시면서 우리가 지닌 사랑병의 그 깊이와 넓이를 계속적으로 더하고 계신다. 이 사랑병은 4장에서 남자가 고백하듯 오 나의 사랑! 하면서 사랑의 길에 서 계시면서 우리를 직접 부르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날 때만 치유를 받을 수 있다.

애도, 즉 사랑의 길에서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고 치유받는 일이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

Ⅳ. 신랑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사랑의 길을 걷기 위해서 어떤 신앙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4:8절에서 남자는 여자를 향하여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남자는 여자와 함께 하기를 원하고 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우선 레바논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방땅에서 내려와야 한다. 산꼭대기 높은 곳, 교만에서 내려와야 한다. 죄에서 악에서 세상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사자굴과 표범이 있는 곳, 위험이 있는 곳에서 떠나야 한다. 세상에는 위험이 많다. 세상에는 유혹이 많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를 향하여 레바논에서 나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함께 가자고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길을 함께 걷기 위해서 영적인 손을 내밀고 계신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잡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주님의 손을 잡지 않는 거기에 있다. 영적인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어디든 가신다. 어디든 동행하신다.
우리가 힘들어할 때 우리의 앞에서 우리의 손을 잡고 이끌고 가신다. 가파른 인생을 이끌어 주신다. 옆에서 또한 동행하신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힘들어 할 때 뒤에서 바쳐주시고 밀어주신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