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의 영이 주시는 자유

박승호목사 / 고후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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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자유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가 얼마나 귀하고 큰지 그들이 치루었던 대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급에서 400년간 노예로 있던 그들을 해방시켜서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하셨다.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일을 대행할 수 있는 주권자, 곧 스스로 할 줄 아는 자유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애급에서는 해방되었지만, 그들의 내면은 여전히 노예로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삶, 새로운 비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장애가 있을 때마다 지도자에게 반항하고 애급으로 되돌아가려 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주먹으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깨달을 때까지 40년을 변함없이 보살피셨다. 자유는 폭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즈벨트는 인간의 기본적인 4가지 자유를 말하면서 ①언론의 자유 ②종교의 자유 ③가난과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④공포로부터의 자유를 거론했다. 그러나 인간에게 더 본질적인 자유는 영적인 데 있고, 정서적인 데 있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자유를 잃었다. 그래서 새삶을 살지 못하고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과거의 사연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바울은 갈5: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했다.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가?
자유의 개념은 두 가지이다. 첫째,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om something), 즉 풀려나는 자유가 있고, 무엇에 예속되는 자유(to something)가 있다. 진정한 자유는 애급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자유이다. 우리 나라의 민주항쟁사를 보면 불의와 독재에서 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다음은 어디로 향해 가야할지를 몰라서 방황하며 왔다.
교회 안에서도 옛자아에 갇혀서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옛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다니면서 천국의 삶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자유는 진리를 알 때 주어진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실력이 있어야 한다. 진리가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 거룩한 성령의 세계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새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교회는 바로 이렇게 잘못된 습관, 가치관,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제대로된 가치관을 형성시켜주는 곳이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성령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신다. 그가 주시는 자유는 어떤 것인가?

Ⅰ. 정결한 마음 안에 자유가 있다.
[고전6:19-20]“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몸의 주인이 성령이시다. 우리를 이렇게 귀하게 만드셨다. 그런데 몸이 원래의 목적대로 쓰여지지 않고 쾌락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바울이 특히 몸을 강조한 것은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육신이란 영혼의 감옥이라는 사상이 당시에 유행했기 때문이다. 영혼은 거룩하고 귀한 것이요. 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에서 몸을 천히 여기는 사상과 풍속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드려야 한다.
만화가 월트디즈니는 만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아무리 재미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본 목적과 흐름에 맞지 않는 장면은 과감하게 삭제하도록 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을 가지시고 만드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목적과 위배된 습관을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목적과 맞지 않는 모습은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 특히 성적인 범죄는 무서운 것이다. 성령의 전인 몸을 더럽히면 영혼이 섞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고전6:15-18]“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술 때문에 삶이 유익하지 못하다면 술을 멀리 해야 한다. 부정적이고 잘못된 관점을 가진 친구가 계속 충동질한다면 그 친구를 멀리해야 한다. 열등감, 상처, 부모가 가르쳐 준 것, 시대가 중요하다고 일러주는 것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이제 새로운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Ⅱ. 주께서 주시는 희망 안에 자유가 있다.
[창13:14-17]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셔서 비전을 주신다. 가야할 인생의 방향을 미리 가르쳐 주신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땅과 자녀이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일생을 살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생전에 그 복을 다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구속사에서 아브라함의 역할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똑같은 비전을 주시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좆아 갔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바라며 가는가?
[요1:42] “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베드로의 미래를 보여주신 말씀이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흔들려도 결국 그 목표를 향해 간다.
절망과 허무,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다. 지성도 능력도 정치적 권세도 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죽음 뒤에 내세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이 아니면 죽음의 장막을 넘어서는 미래지향적인 소망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하지 못한다. 자유는 미래이다. 미래에 대한 보장과 약속이 없이는 자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바라보면서 소망의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 미래가 없으면 현실에 매여 살 수밖에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27년간 감옥에 있었다. 만델라가 감옥에 있을 때에 딸이 아이를 낳아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다. 그는 손자의 이름을 ‘hope(희망)`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희망을 따라 살았던 그가 석방되던 날 그의 모습은 참 자유자의 표정 그것이었다. 그는 대권을 이어 태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사람으로서 세계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무엇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는가? 희망이 그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을 갈망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희망을 일구는 지혜, 준비가 필요하다.
1. 기도하라.
희망은 기도하는 자에게 열린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희망을 요청하는 것이다. 기도는 동시에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급한 성격 때문에 인내를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내를 지금 당장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단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2. 계획을 세우라.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계획을 짜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절망하고 좌절하여 가만히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뤄주실 것을 믿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다. 건물을 짓는데도 설계도가 필요하다면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계획이 없어서 되겠는가? 거룩한 영이 내 안에 계신다. 우리는 막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준비하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계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원하긴 하지만, 그것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 결혼할 인격은 갖추지 않고 구하기부터 한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이것은 신비주의이다. 준비하는 사람만이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다. 설계도 없이 집을 지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내 인생의 조감도를 그려보고 설계도를 보완해야 한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시간만 보내지 않는다.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꿈인 사람은 내가 나갈 나라의 문화를 연구하고 언어훈련을 하며 보내야 그 꿈이 이루어진다. 기회가 주어졌어도 능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그 기회를 선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꿈을 가지고 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의 그릇을 키워야 한다.


Ⅲ. 헌신적인 사랑 안에 자유가 있다.
[요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 죽음의 바이러스를 가진 사람은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인다. 희망과 사랑의 사람은 자기도 살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린다. 사랑은 살리는 힘이 있다. 성령님은 우리를 살리려 오셨다.
소설가 최인호씨가 쓴 ‘사랑의 기쁨’은 헌신적인 사랑이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내용은 한 부부가 살다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좋아하던 딸은 아버지에게서 자랐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을 때 엄마에게 아버지를 용서할 것을 권했지만, 끝내 외면한 엄마. 그 엄마에 대한 분노로 거식증과 우울증에 걸려 죽게 된 딸을 구하려 했지만, 딸의 반항은 결국 엄마마저 암으로 죽게 했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는 동안 엄마가 자신을 위해서 사랑의 기회를 포기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엄청난 사랑의 대가로 존재함을 깨달은 이 딸은 우울증을 극복할 힘이 생겼다고 한다.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이 딸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했다.
우리 인생에 어려움을 이겨나갈 힘은 무엇인가? 사랑의 힘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늘을 사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떡을 먹어야 하고 사람의 영혼은 성령을 먹어야 산다. 우리 내면세계가 풍요한 것은 성령님 때문이다. 살리는 영이 우리 속에 오셔서 서로를 격려하고 사랑하게 하신다.

유치환의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리고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우리의 소원은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살아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