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박승호 목사 / 엡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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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엄마 나는 나 맞아?” “응 맞아” “그런데 왜 애들은 나보고 너라고 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진정한 나인가? 나는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감형성에 어려움을 느낀다. 자기정체감을 어떻게 형성하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데 생각해 봐야할 심각성이 있다. 잘 못 형성되어 온 거짓된 자아에서 진정한 자아가 무엇인지 말씀 안에서 찾도록 하자.

Ⅰ. 하나님이 만드신 나
두 자녀를 둔 부모가 한 자녀를 편애하여 비교하며 길렀다면 비교당한 아이는 늘 비교의식 속에서 열등감, 무가치감, 죄책감, 부적응감 등으로 시기와 질투와 같은 문제감정 속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매사에 초점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며 관심과 인정을 빼앗길까봐 상대방의 허물을 지적하거나 인격을 훼방하는 언행을 하게 된다. 또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서 타인에게 인정을 받거나 존중을 받는 어떤 한가지 특성만을 발전시키는데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신의 자신됨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가 다른 사람과의 상대적인 비교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사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이 만드신 나,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가치는 비교될 수 없는 가치이다. 부모의 평가 전에 더 값진 평가를 하나님은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Ⅱ. 인간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인간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다. 즉 나를 형성한 과정이 있다. 나의 성장배경에는 가족, 친척, 이웃, 친구 등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되고 주입되고 강요된 내가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역사 안에 있다. 즉, 각자 가지고 있는 특이한 역사 때문에 특이한 사람들이 되어 있다. 개인의 역사는 그 개인의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그 사람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의 인간관은 인간을 아무 목표도 없는 비지향적인 존재로 보고 과거가 절대적이며 현재의 생각과 행동은 과거의 영향이라고 하는 정신결정론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역사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기독교의 인간관은 비록 각 개인이 과거의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갈 수 있음을 말하는 데 이것이 기독교의 인간관이다. 그러므로 나는 역사 속에 갇혀 더 이상 변화될 수 없는 결정지어진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변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서 새로운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다.

Ⅲ. 중독증의 종류
가요 중에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라는 노래가 얼마 전에 히트했었다. 나의 자아형성과정 속에서 나와 관여된 사람들이 내 속에서 나를 운전하고 있음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내 속에 나를 이끄는 운전수가 잘못되어 있을 때 건강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되는데 그것은 어딘가에 중독되어 사는 것이다. 중독성의 가능성이 많은 사람의 특징은 어린 시절 지나치게 불우했거나 사람으로서 인격적인 대접을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요즘의 중독의 종류 중에는 인터넷 중독, 알콜중독, 약물중독, 담배중독, 등이 있다.
중독의 해악은 결국 모든 중독은 정상적인 삶이 파괴된다는 점이다. 건강을 잃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자체와 이웃의 삶을 해치게 된다. 중독된 사람은 혼자의 문제가 아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이기에 가정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발생하면 온 집안이 함께 아파야 하고 함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독에 이르기 전에 미리 미리 예방을 하고 사후에는 적절한 처방이 필요하다. 게임에 중독 된 아이를 다루는 법은 다음과 같다.
1)부모가 함께 통일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2) 애정을 보여준다.
3)합리적인 규칙과 인터넷 사용시간을 정한다.
4)컴퓨터를 가족이 지켜 볼 수 있는 공간에 위치시킨다.
5) 인터넷 외에 다른 취미생활을 권한다.
6)필요하면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Ⅳ. 하나님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자신을 , 세상을 보라.
인도네시아는 인구2억 중 30%인 6천만명이 예수를 믿고 있다. 이슬람국가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결과 아시아 최대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그 중에 큰교회라고 할 수 있는 수루바야 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아브라함 알렉스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목사님의 가정에 뇌성마비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이슬람교도들의 비웃는 손가락질을 견디어야 했다. 그 때 그는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아들의 건강한 모습을 그리며 기도했다. 어느 날 그 아들이 정말 멀쩡한 모습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목사님은 제한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 한계가 없는 믿음의 능력을 믿게 되었고 그 아들과 함께 제한이 없는 축복, 한계가 없는 기적을 맛보며 살고 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눈을 갖는 것이다.

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방법
겉 사람의 건강을 위해 운동, 좋은 음식, 보약 등을 가까이 하듯이 이 속 사람의 건강을 위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이 속사람의 건강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1)속사람의 건강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해 진다.
속사람의 속성은 영적인 것이다. 영적인 건강은 영적인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해 지는 법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영적인 힘을 키울 수 없다. 바울이 박해하던 예수님을 증언하는 전도자가 된 것은 그 자신의 경험이나 내적인 성찰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철저한 성령의 힘에 의해서 된 것이다. 인간의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2)그리스도를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머물러 있다’라는 헬라어 ‘카타오이코스’이다. 이 단어는 ‘카타’(down)와 `오이코스`(house)의 합성어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속 사람의 집에 편히 거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주님이 편히 계시는 공간이 되도록 우리 마음이 깨끗하게 청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려면 우리의 마음이 먼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
3)믿음의 눈으로 자신을 봐야 한다.
미국에서 한 실업가가 있었다. 잘되던 사업이 친구의 배신으로 사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다시피 한 이 사람은 자기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고 분노와 불평을 터트렸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는 이 실업가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종이에 기록하게 했다. 자녀, 자신과 가족의 건강, 신용, 친구, 미국시민권, 그랬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조금 전에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하시더니 제일 좋은 것은 하나도 잃지 않았군요.” 목사님의 말씀을 들은 이 사업가는 그 순간부터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다시 사업에 도전했고 종내는 전보다 더 큰 사업으로 성공했다는 빈센트 필 박사의 간증이다.
어떤 사람은 10명의 친구 가운데 자기를 좋아하는 아홉명을 두고도 싫어하는 한명 때문에 시간을 소모하며 괴로워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묵상하지 않고 원수를 묵상하는 것으로 시간을 다 보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를 생각해 주는 한명의 친구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행복해 한다. 영어의 thank과 think는 어원이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불평이 될 수도 있고, 감사도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