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죽음, 그 이후의 만남

박승호 목사 / 요20:19-23

dot01.png

본문

이 땅에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종교는 없다. [고전15: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을 이긴 인간도 없다. 이 땅의 종교지도자들은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결국 그들도 사망을 이기지 못하고 무덤 속에 갇히고 말았다. 유럽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던 피아트의 후계자 지오반니는 33살에 암으로 죽었다. 건강, 다이어트식품 회사인 허벌라이프의 창업자 휴즈는 “나는 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훌륭한 다이어트 및 건강 보조 식품을 공급하는 데 생애를 바치겠다” 고 했지만, 그는 44세의 아직 젊은 나이에 해변의 초호화 별장에서 잠자다 숨졌다. ‘만가’를 지은 성삼문은 죽음에 의연했지만, 죽음 이후에 길을 알지 못하여 허망한 마음을 노래로 지어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과연 죽음은 무서운 존재이다. 죽음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그러나 죽음으로써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생 속만 썩이다가 결국 형무소에서 사형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전도하며 죽어가던 사형수의 죽음, 우리 나라에서 교육계의 지도자로 높이 존경을 받았던 김활란 박사는 “나의 장례식에서 장송곡을 부르지 말라. 음악회와 같이 축제와 같이 지내다오.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말라!” 그래서 그 장례식은 훌륭한 음악회로 축제같이 치러졌던 일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처럼 사람이 살아서만 역사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내가 살아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고 착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병들어서 일하고, 실패하여 큰일을 이루고, 죽어서 위대한 역사를 남긴 이들이 동서고금에 얼마나 많은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나폴레옹은 죽는 순간에 가장 사랑했던 세 가지를 중얼거렸다. “내 조국 프랑스, 충성스런 군인, 사랑하는 아내 조세핀” 그의 고백에는 인생을 마감하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 베토벤이 죽음을 맞으며 읊조린 말 속에서는 진한 허무와 체념이 묻어난다. “친구여 이제 희극은 모두 끝났네” 톨스토이도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 몸을 떨었다. “이제 나는 어찌할 것인가?” 스탈린은 임종할 때 두 눈을 부릎뜨고 왼손을 내저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절대군주였던 루이 14세는 죽음이란 단어를 그 앞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20세기의 유명한 화가 피카소도 그 앞에서 아무도 죽음이란 말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회피하거나 싫어한다. 말 못하는 동물들조차 그런 것 같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마지막으로 처량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보면 짐승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을 이기신 분이시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의 모습,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무엇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지,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30절)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하신 첫 말씀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이다. 제자들의 형편으로 보아서 맞지 않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일을 두고 제자들이 훔쳐가서 없어졌다고 헛소문을 내며 부활사실을 은패하려 하는 당국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체포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의 제자들에게 평안하라고 말씀하신다.
평안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이 주는 평안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주는 평안이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소유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유를 추구한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건강하다고 평안한 것은 아니다. 돈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평생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세상 평안은 일시적이며 상황적이며 상대적이다. 세상의 모든 평안은 문제가 없을 때 주어지는 것이므로 문제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평안을 상실해 가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평화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로마식 평화(Pax Romana)이다. 이것은 힘에 의한 것이다. 전쟁의 승리, 힘의 지배에서 오는 평화이다.
둘째, 헬라식 평화(Eirene)이다. 이것은 마음과 정신의 평안이다. 철학적으로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얻는 평안이다.
셋째,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시는 평안이며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평안이다. 모든 것이 자유를 얻는 평안이다. 하나님과 나, 나와 나자신,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 나와 자연과의 관계 모두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나실 때도 평화를 선포하셨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은 죽으실 때도 평화의 주님으로 죽으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는가? 평강을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러 오셨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Ⅱ. 나도 너희를 보낸다.
안병욱교수의 글은 감동을 준다. 그는 “인생에 대하여” 라는 글에서 “뻐꾸기는 뻐꾸기 답게 노래할 때 행복하고, 참새는 참새답게 지저귈 때 행복하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고, 음악가는 노래를 부를 때 삶의 보람을 느낀다. 미켄란젤로는 망치를 들고 대리석으로 자기의 이미지를 조각할 때 인생의 행복을 느끼고, 에디슨은 연구실에 들어박혀서 새로운 발명에 심혈을 기울일 때 사는 보람을 가진다. 인간은 창조하는 자유, 건설하는 자유를 갖는다” 라고 했다. 할 일을 찾아야 한다. 나도 남은 생애 우리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이루려고 하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남겨 좋으셨다.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 “대리자” 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오셨고, 12사도들은 우리 주님이 보내셔서 활동하신 주님의 종들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명을 받아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Ⅲ. 성령을 받으라.
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힘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한다. 성령님이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며 통치하신다. 열정이 엔진과 같다면 성령은 엔진을 움직이는 power와 같다. 성령하나님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지 못하면 영적 통찰력도 불가능하고, 관계와 일도 잘 처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열정 또한 쉽게 식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신앙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 타이타닉을 본 사람들은 매우 인상적인 한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절대로 파선할 위험이 없다고 믿었던 타이타닉호는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해 갔다. 영화의 대부분은 픽션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위기 앞에서 우왕자왕 살아보려고 애쓸 때 끝까지 연주로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찬양의 가사에 담긴 메시지로 하늘의 거룩한 소망을 바라보도록 촉구한 사람들이 있다. 그 밴드팀의 단장은 월레스 하들리라는 사람인데 그는 혼란의 판국에서도 자신의 동료들을 격려하면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그를 가까이 하십시오. 그가 소망입니다.” 사람들은 침몰해 가는 배 속에서 이 찬양을 통해서 메시지를 들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청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더 나가기 원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 우리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세가지이다.
1)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즐기면서 살아야 하다.
2)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해야할 주님의 일군으로 보냄을 받았다.
3)성령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