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광야로 나간 사람들

박승호 목사 / 요6: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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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오늘 모 장로님이 별세하셨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이제 찬송하겠습니다. 복음송가 ‘오 이 기쁨’입니다. 좌중이 썰렁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로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일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난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지혜롭게 사용하지 않으면 결과는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이 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민수기14장28절에 의하면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신앙의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한 말은 그 순간에만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원망과 불신앙의 말을 하고 살았던 결과였다. 말은 계속되어온 습관을 따라 하게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구원하시고도 그들에게 광야의 고난을 주시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하나님의 일을 대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시는 기간이 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또한 광야의 40년의 훈련이 필요했다. 신앙은 한 순간 불을 체험한다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뀌거나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이 바뀌고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도적으로 광야의 수업을 하도록 인도하신다. 우리의 생각, 언어가 하나님을 대행할 때까지 우리를 훈련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와 메추라기, 생수 등은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는 도구이다.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를 광야로 부르신다. 왜 우리를 광야로 부르시는지 말씀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자.

Ⅰ. 광야는 잘못된 가치관을 바르게 교정시켜 주는 곳이다.
에서는 장자권의 가치를 알지 못해서 배고픈 상황에 급한대로 팥죽 한 그릇에 동생에게 장자권을 이양하고 말았다. 사울왕은 쓰임받던 이스라엘초대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판단보다 사람들의 판단에 의해서 행동하다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죽었다. 르우벤은 장자로 태어났으나 자기 욕구를 이기지 못해 장자권의 축복을 잃고 말았다. 이 모두는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몰랐던 사람들의 결과이다.
우리도 세상 살면서 덜 중요한 것에 관심하다가 진정 중요한 가치를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훈련을 하신다. 광야는 바로 우리의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장소이다. 광야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먹고 마시며 살 수밖에 없다. 내 의지 내 소리를 내려놓게 하는 곳이다. 광야는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을 바꾸기 위해 이렇게 우리의 힘을 빼는 곳이다. 마치 수영하는 사람이 물위에 뜨는 것이 가능하려면 몸에 힘을 빼야만 가능하듯이 불필요한 우리의 힘을 빼야만 중요한 것을 보게 된다.

Ⅱ. 광야는 우리를 고독하게 하여 주님을 만나게 하는 곳이다.
반짝이는 별을 불 수 있는 것은 어두운 밤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캄캄한 밤을 지나게 하시는 것은 별처럼 아름다운 작은 것들이 우리 인생에 있음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광야는 사람으로부터 나를 고립시키는 곳이다. 쓰임 받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광야의 고독을 경험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라도 혼자 있게 하신다. 혼자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평소에 너무 분주해서 식사시간 외에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에게 때로 하나님은 한가하게 하신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에 비로소 주님만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 그런데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입도록 하신다. 궁극적으로 치유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Ⅲ. 광야는 적들을 만나게 해서 주님을 붙잡게 하는 곳이다.
광야는 사람을 헤치는 전갈과 같은 것들이 숨어 있는 곳이다. 지쳐 탈진한 상태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곳이다. 다윗은 자신을 추적하는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녀야 했다. 그 고난이 얼마나 컸으면 심지어 원수의 땅으로 피신했겠는가?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 가운데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시57:4]“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다윗이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은 바로 이런 고난의 체험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바울 또한 이렇게 말한다. [고후1:8-9]“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것을 다 잃고 철저한 고독을 경험 한 때이다. 위기와 사건 가운데 직면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보지 않는 우리의 속성 때문이다.

Ⅵ. 광야는 상실을 경험케 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는 곳이다.
소설 ‘빙점’을 써서 일본을 놀라게 한 미우라 아야꼬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13년간 척추카리에스로 병상에 있었다.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 때문에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건강을 잃었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런 그를 나름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쓰임 받도록 하셨다고 고백한다. 병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으며 고난이 유익이 된 경우이다.
[시119: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록펠러는 그 어머니의 신앙교육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십일조를 반드시 했고 그래서 그는 경제적인 부를 누렸다. 그런 그도 점점 바빠지면서 십일조는 했지만, 예배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그가 중년에 알로피셔라는 병을 앓게 되면서 다시 결심하게 된다. 내가 1년을 더 산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으리라. 그의 회심은 그를 그 후에도 40년을 더 살게 했다.
손가락이 네 개 뿐인 피아니스트 ‘이 희아’는 이미 전 세계에 알려질 만큼 유명한 장애우이다. 그의 어머니는 희아가 뱃속에 임신해 있을 때 이미 장애가 있음을 알았지만,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음성을 듣고 그대로 받기로 했다. 자신을 버리고 희아를 위해 사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고난도 은총도 다 주님의 찾아오심이다. 1%의 가능성 속에서도 주님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