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위로의 하나님」

이성찬 목사 / 고후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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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호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위험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때로 견디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지금까지 믿고 있던 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회의가 생긴다. 하나님은 과연 병주고 약주는 분이신가? 고난이 없으면 좋은데 왜 고난을 주시고 또 건져주시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오늘 본문에나타난 바울의 고난이 무엇이며 또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오늘 우리에게도 왜 고난을 주시며 어떻게 건지시며, 고난의 유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


Ⅰ. 바울이 당한 고난-큰 사망과 같은 고난

바울에게서 허락하신 고난은 극심하였다. 8절과 9절에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 아시아에 복음전하기 위하여서 당한 그의 고난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살고자 하는 소망까지 끊어져버리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극심한 고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1장 24-27절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면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람에게 그래도 살고자 하는 본능이 가장 강한 것인데 심한 환란으로 인하여 살소망조차 갖지 못하는 지점에 까지 이르도록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말이다.
이처럼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이 있다. 믿음이 있으면 있는대로 조금 약하면 약한대로 신앙과 관련된 것도 있고 혹은 경제적인 문제로 혹은 자녀의 문제로 혹은 배우자의 문제로 끝임없는 문제에 둘려싸여 환란을 겪는다. 우리 인간들은 환난이나 고난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 반드시 자신이 감당해야할 고난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없고 고난을 회피하지 말아야한다. 환경을 탓하지도 말아야 한다.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한다. 오히려 고난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야 한다.


Ⅱ. 넉넉히 건지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 1장을 읽어면서 1장 9절 상반절에서 곧바로 하반절의 고백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9절 상반절을 읽은 이후에 10절을 읽어야 이 본문이 잘 이해된다.10절이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큰 사망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이다. 극심한 사망이라고 보아도 되겠고 내가 두려워하는 사망이라고 보아도 되겠다. 하여튼 사망으로 상징되는 극심한 환경에서 우리를 건지신다고 말씀하신다.

이 본문의 표현이 정확하다 .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이러한 곤경에서 예전에 건지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를 한번 돌아보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은 공간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또 건지시리라 -또 지금도 건진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형이다.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 나아가 이후에라도 건지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난 앞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고난의 때에 사도 바울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였다. 철저하게 말이다. 극심한 환란가운데 있을 때에 인간들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하는 위로는 부차적이다.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문제 앞에서 무슨 말이 위로가 된다는 말인가? 구약성경의 요셉을 보라.
요셉의 인생을 종합하면 내던져진 인생이었다. 형제들에 의해서 구렁텅이에 던져졌고 상인의 손에 팔려갔다. 자기의 상관에 의해서 감옥에 투옥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구렁텅이에 던져지고 팔려간 인생, 감옥 속에서도 하나님은 팔을 벌리셨다. 하나님의 손길은 그를 건져 올리셨다. 분명 우리 인생이라는 배의 키는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 삶의 기반이 무너져버린 인생에게도 하나님은 위로의 손길을 내미신다. 잿더미에서도 하나님은 다시금 일으켜 세우신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요한복음 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해도 우리를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손이 있다. 그 손은 만유보다 크신 손이다. 아무도 이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품에 안겨서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건지시는 하나님, 넉넉히 사망의 구렁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의뢰하여야한다.



Ⅲ. 나아가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하신다.
4절이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어떤 사람은 환란이 왔을 때 믿음의 싸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서 그냥 주저 않아 있는 사람이 있다. 원망과 불평이 그 마음 가운데 일어난다. 주님을 위해서 흘린 수고의 땀이 얼마인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결실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가 나를 아프게 하고 나오는 것은 한 숨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격려도 다른 사람의 조언도 다,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내 마음 안에서는 오직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 우리 주님은 그 마음의 깊은 곳에 가셔서 친히 피흘린 손으로 어루만져주시고 안아주시고 그리고 아무 말없이 쳐다보아주신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위로이다.

실로 하나님의 위로는 광범위하다. 모든 환난 가운데서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 문제는 오직 나에게만 있겠지라고 말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의 터널을 지나났다. 이 고난을 지나간 사람들이 무수하다. 그런데 이것의 정점에 바로 예수그리스도 자신이 고통을 경험하였다. 주님은 고통의 정중앙으로 돌파해 가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그래서 주님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신다.


Ⅳ.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다.
바울이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당하여서 누린 유익은 무엇인가? 두 가지이다,

(1)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게 한다.
9절 하반절이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심이라”(9절 하반절)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나의 자랑을 내려놓게 하시고 나의 힘과 나의 자신감을 접어 두게 하신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제 삶의 온전한 주인이십니다”라는 고백의 말이다. 고난은 우리의 관점을 바꾸는 하나님의 작업이다. 하나님은 바로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독점하시기를 원하신다. 고난을 통하여서 우리의 주인되시기를 원하신다. 연약한 인간임을 고백하고 “주님 내가 주님의 위로하심이 필요합니다. 저는 주님이 없으면 도저히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신다.

교회사를 보면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에게도 동일한 고난을 허락하셨다.
요한 웨슬레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요한 웨슬레는 새벽4시에 일어나서 하나님과 기도시간을 가지는 위대한 믿음의 일꾼이었고 일평생을 복음전도를 위한 여행을 하면서 지냈다. 그 사역의 결과는 엄청나서 온 영국을 개혁시켰다. 하루 평균 4-5차례식 설교하였는데 53년간 이렇게 사역하였으며 총 4만 2천번의 설교를 하였다. 그렇게 해서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사역자이다.
때로는 돌을 맞고 그리고 박해를 당하는 것은 그래도 견딜만했다. 그런데 더 힘들게 했던 고난이 그에게 있었다. 바로 가정이었다. 그는 사역에 혼신의 힘을 쏟다가 47세에 결혼했다. 만혼이다. 그의 아내가 얼마나 악처였으면 웨슬레의 전기 작가 중의 어떤 사람은 구약성경의 욥의 아내와 나란히 인류의 역사를 통 털어서 가장 악한 아내들 중의 하나라고 평가했다. 4명의 자녀를 둔 과부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의 아내는 급하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몇 번 집을 나가곤 했는데 결혼 2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는 어느 날 집을 나가서는 근 일년동안이나 돌아오지 않고 남편의 애를 먹였다. 뿐 아니라 가정의 문제가 복잡해져갔다. 자녀들 중에 한 아이는 죽었고, 또 한 아이는 병에 걸렸으며, 남은 두 아이는도 부모를 힘들게 하였다. 그러니 얼마나 웨슬레의 마음이 아팠겠는가?

이러한 시련을 겪고나서 웨슬레는 나중에 회상하기를 “만약 나의 부인이 훌륭한 아내였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위대한 사역에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고백하였다. 그 만큼 성숙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것이 고난의 유익이다. 내가 지금 당하는 고난은 너무 너무 힘들다. 그러나 이것을 견디고 나면 나중에는 세상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넉넉히 감당하기에 이른다.

(2)이제 고난을 이겨낸 자는 위로자로 존재하게 된다.
5절이다.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는 다 위로가 필요한 존재이다. 존재 자체가 그렇다.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다. 병든 자는 따뜻한 관심과 위로가 필요하다. 말이 아니라 주변에서 누가 있어 주는 것이 위로이다. 고통가운데 있는 자도 마찬가지로 위로가 필요한 존재이다. 그러면 부자는 어떤가? 마찬가지로 위로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이다. 권력자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이 만드신 고난의 공간이 인간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나이도 관계없다. 어린 아이도 위로가 필요하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더더욱 위로가 필요하다. 한 마디의 위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누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가? 고난을 겪어본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겪은 우리 자신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이 손길이 너무나 신비하다. 그래서 신비라고 밖에 더 말할 방법이 없다.
앞에서 위로자로 살라고 하지 않고 “위로자로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 것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기능으로 혹은 역할로 평가받는 존재가 아니다.
일반사회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실력을 평가한다. 경제적인 자산 가치와 신용도를 평가한다. 물론 객관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성경의 평가는 그 이면(裏面)을 본다. 얼마나 고난을 통해서 단련되었는가를 본다는 점이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그가 그 자신을 지키고 있음 자체가 잔잔한 감흥을 주는 존재이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그 존재가 앉아 있는 자리만으로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래서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이다.


● 결론
많은 고난은 우리들의 시각을 교정하여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동기를 다듬어 주신다. 예전에는 내가 중심이 되어서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난 고난을 당하고 나면 바라보는 방향이 바뀐다. 그래서 이제는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게 된다.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인 나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서는 주변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의 고통같이 느껴져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조심하게 된다.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익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절대로 낙심하지 않는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곤경에서 건져주신다. 놀라운 하늘의 위로를 주신다. 그래서 우리자신이 주님께 더욱 정결하게 가까이 가게 하신다. 그 위로의 손길이 이번 한 주간도 지속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고후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