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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1-11 “나의 향품을 내려놓고”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둡니다(눅23:52-53).
1. 예수님이 죽으시고 안식 후 첫날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갑니다. 1-6절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은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을 찾아갔지만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의 증거 세 가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1)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러 간 것(2절), (2)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3절), (3) 천사의 선언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6절). 예수님이 전에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한다면 무덤은 비어 있어야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합니다(눅9:22, 눅18:32-33). 분명히 고난받고 죽음 당한 후에 삼일 만에 살아나신다고 했었기 때문에 무덤은 비어 있는 것이 정상이고, 사실 향품이 아닌 찬양의 악기를 가지고 갔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그제서야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제자들과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11명의 사도들은 그녀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평생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고전15:12-2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부활도 없고 우리의 죄사함도 없는 것입니다. 즉, 부활이 있어야 죄사함이 있고, 부활이 있어야 구원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살고(부활),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는(승천) 우리가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지 말씀하십니다(엡2:5-6, 고전15:35,42-44). 우리가 오늘을 견디고, 헌신하고, 자기부인하면서 하나님의 기준, 원칙과 가치를 따라가는 이유가 바로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을 믿는 자는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하는가? (향품)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1절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자들은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서 무덤으로 갔습니다. 제자들과 여자들은 예수님의 죽음만을 슬퍼합니다. 그 이유는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고, 부활을 신뢰하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러 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지금 왜 이렇게 빛을 잃고 힘이 없을까요? 부활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십자가까지만 보고 죽음을 애도하며 향품을 손에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을 믿지 못하니 보이는 것만 붙잡고 향품을 손에 쥐고 슬퍼하며 두려움과 분노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보지 못하고 십자가까지만, 이 땅의 죽음까지만 보기 때문에, 향품을 손에 쥐고 이 땅에서 나의 슬픔만 애도하는 것입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자기가 이해하는 삶만 살려고 하고, 오직 나의 슬픔과 이 땅의 것만을 계속 애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믿어지면 이해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믿어진다면 이 땅에서(의) 고난이나 수치나 모욕과 배반이 견딜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당하는 수치와 모욕, 나를 분하게 하는 것들을 붙잡고 멈추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 죽음을 애도하는 향품을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이제는 죽음을 애도하는 내 손에 있는 수치, 분노, 분함, 배신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을 내려놓고, 부활을 믿는 자로서 일어나(쿰) 나가야 합니다. 그 슬픔을 넘어서, 그 분노를 넘어서, 그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부활절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로 새 생명 얻은 자는 더 용서하고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