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우리는 생명의 부양자입니다.

박승호목사 / 창41: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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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세상이 보는 성공의 개념은 과시적이고 외형적이고 비교의식 속에서 상대적인 성취감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성공개념으로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과연 우리가 성공자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본문의 요셉은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브낫 바네아(생명의 부양자)로서 성공한 사람이다. 우리도 요셉처럼 생명의 부양자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인지 요셉의 생애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생명의 부양자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을 찾아보자.


Ⅰ. 자기 발전, 성장이 있어야 한다.

시 105:16~19. 하나님은 요셉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부양해 먹일 수 있는 지도자로 세울 계획을 가지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과 실력을 갖추어야 했다. 요구하시는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요셉을 향한 여호와의 말씀이 그를 연단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우리도 연단을 받는다. 나 중심의 구조에서 하나님 중심의 구조로, 의도하신 수준으로 우리가 변화될 때까지 광야의 훈련을 받는다.

시 23편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에도, 쉴만한 물가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내려가게 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수준(의의 길)으로 우리를 끄집어 올리시려는 목적에서이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 위해서는 훈련을 잘 받아야한다. 자기탐욕, 자기생각, 자기고집에 머물면 실격 된다. 성장하고 발전하여 하나님의 의의 수준까지 우리의 의식이 올라가야 한다.


Ⅱ. 자기부인이 있어야 한다.

51절에서 요셉은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잊어버림)라고 불렀다. 요셉은 상처가 많았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형들에게 배신당해 노예로 팔리게 되고 십년동안 열심히 일했던 주인과 주인의 아내로부터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옥에 갇히며, 꿈을 해석해 주었던 술맡은 관원장은 2년씩이나 그를 잊고 있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다 상처가 있다.

그러나 요셉이 우리와 다른 점은 므낫세 이름을 부르면서 과거에 매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사명에 의해 살았다는 것이다. 내 느낌보다도 부르심의 목적이 중요하다. 과거의 상처 파먹고 살지 말자.

잠 17:3에서 사람의 마음은 하루아침에 움직여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주님의 망치에 깨어지고 부숴져서 부드럽게 되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고 또 수백 배의 결실도 맺을 수 있게 된다. 주님 앞에 나를 내려놓고,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붙잡기를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


Ⅲ. 신뢰의 마음,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52절에서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다. 둘째 아들을 낳아 에브라임(하나님은 두 배로 보상하신다)이라고 선포했다. 이 믿음 때문에 그는 고통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은 요셉의 가슴이요, 철학이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다. 므낫세가 과거에 대한 치유라고 한다면 에브라임은 미래에 대한 보상이었다.

아무나 성공자, 지도자,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요엘 2:25에서 하나님은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고통당한 세월만큼 우리에게 보상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늘의 고난이 내 인생의 종착지라고 생각하지 말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룰 때까지 나는 주님을 믿고 주님을 순종함으로 훈련의 길을 잘 가야한다.


Ⅳ. 목자의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복의 근원, 생명의 부양자, 왕같은 제사장, 열국의 아비이다. - 이러한 것들은 나 혼자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섬기고 공급해야 하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생각, 내 야망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베풀 줄 모르는 사람, 나눠줄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한다.

창 45:5-8에서 요셉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이유는 ‘형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나를 보내셨다’는 그의 고백 때문이다.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의 해석이다.

이제 우리는 요셉처럼 사건을 구속사 지향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이다. 좋을 때만이 아니라 궂을 때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고난도 축복도 부담도 사명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브낫 바네아이다. 나를 인해 구원받을 사람, 내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손을 뻗어서 그들에게 생명의 부양자가 되자.(끝)